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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Jan 14. 2024

영어를 배우는 건 쉽지 않다

1991년


해가 지나고 1991년이 되었다.  그해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다. 고르바초프가 통치하던 소련 연방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었고 얼마가지 않아 실패했다. 새벽에 일을 도우려고 샌드위치 가게에 갔었는데 배달된 조간신문 1면에 모스크바 광장의 탱크 사진들이 대문짝처럼 나와 있었다. 나는 그때 쿠데타 (Coup d'etat)가 영어가 아니라 불어란 걸 처음 알았다. 그나마 기사에서는 줄여서 Coup이라고 쓰여 있어서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내가 평소에 들고 다니던 빨간색 동아 영한사전을 뒤적여야 했다. 


나는 눈에 보이는 모든 단어를 다 외우겠다는 일념으로 항상 빨간색 영한사전과 파란색 한영사전을 어디든지 들고 다녔다. 홍콩에서 온 아이들은 돈이 많아서 전자사전을 들고 다녔는데, 참 편하겠다 생각은 했지만 돈도 없었고 그때는 메모리의 한계로 전자사전의 콘텐츠는 종이사전보다 훨씬 부실했다. 학교에서 영어를 못 알아들으면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빨간 사전을 뒤적인 후에 고개를 끄덕였고,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으면 다시 한번 기다리라고 신호를 보내고 파란 사전을 뒤적였다. 어머니는 영한사전은 민중서관에서 나온 엣센스 영한사전이 최고라 하셨지만 그건 너무 무겁고 두꺼웠고 휴대성으로 보면 그 당시에는 동아사전이 제일 나았다. 물론 그 휴대성이 좋은 사전이란 것도 지금 핸드폰의 서너 배 정도 되는 부피였다.  사전이 도움이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발음 같은 건 헷갈릴 때가 많았다. 한국의 친구가 요새 유행하는 MC Hammer 앨범 테이프 좀 보내달라고 해서 동네 레코드샵에 가서 "맥 해머 테이프 있어요?" 하고 물어보자 점원은 내가 계산하고 나올 때까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MC 가 붙으면 맥도널드처럼 다 맥으로 발음하는 줄 알았다. 그래도 귀찮다고 사전을 안 들고 다니면 꼭 문제가 생기곤 했다. 아버지가 두통약 좀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켜서 약국에 가서 그림만 보고 눈치로 사 온 약은 변비약이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이니 번역기니가 흔해져서 정말 맘만 먹으면 언어 하나 배우는 건 예전보다 너무 쉬워진 것 같다.


나는 그 사전들을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썼다. 하루에 몇 번씩 몇 년 동안 사전을 찾다 보니 언젠가부터 나는 원하는 단어를 한 번에 펼쳐서 찾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정도쯤에 있지 않을까 하고 대충 펼치면 열에 아홉은 맞았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인간은 피나는 연습을 하면 불가능해 보이는 기술을 취득하게 된다. 요새는 생활의 달인들이 나오는 방송에 이상한 맛집들이 주로 나오지만 예전에는 그런 신기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곧잘 나왔다. 나도 사전 찾는 소년 이런 걸로 방송을 탔었을지도 모른다.


그해에는 제1차 걸프전도 발발했었다. 나는 주말 아침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CNN이 쉴 새 없이 틀어주는 유도탄의 카메라 송출 영상을 보았다.  흐린 흑백 영상이었지만 굉장히 빠른 속도로 건물을 향해 날아가다가 폭파 시점에서 영상이 끊어지는 걸 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CNN은 전쟁을 전자오락 같은 것으로 묘사했고 전쟁은 더 이상 할머니들이 머리에 짐을 이고 피난을 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미사일은 적진 어디에나 떨어질 수 있었고 버튼만 누르면 멀리 있는 사람들을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광경들을 남의 일처럼 재미로 구경했다.


그런데 전쟁이 길어지자 걸프전은 나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즐거움을 방해했다. 그때는 토요일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Looney Tunes라는 워너 브라더스의 만화영화를 방영했었다.  사실 몇십 년 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것들이었고 재탕도 여러 번 했었지만 그만큼 재미있는 만화영화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나는 거기서 배운 짧은 영어들을 학교에서 가끔 써먹었고 어쩌다 분위기에 맞는 말을 하면 아이들이 웃어 주었기 때문에 나는 한 마디라도 더 배우려고 열심히 TV를 봤다. 


만화영화를 봐야 될 시간에 쓸데없는 전쟁속보와 백악관 브리핑 같은 게 화면을 채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짜증이 났다. 사실 세계정세는 우리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핵탄두가 날아다니건 말건 아침에 샌드위치 가게로 출근해서 야채를 다듬는 건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딱히 갈 데가 없었기 때문에 그때도 항상 집에서 오후 다섯 시부터 시작하는 어린이 프로를 빠지지 않고 봤다. 언젠가 한국에서 K가 보내오는 편지에는 얼마 전에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너무 감명 깊었단다, 눈물이 나더라고. 넌 거기서 주로 뭘 보니? 하고 적혀 있었고 나는 "응 나는 오리랑 토끼랑 개랑 나오는 만화를 매일 봐" 하고 답해 주었다.


영어를 배우려고 사전에 매달렸고 티브이를 봤고 아이들이 하는 말을 나중에 혼잣말로 되풀이하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영어는 별 불편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에 들어간 후 그게 엄청난 오산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고등학교 수업은 전부 알아들었지만 대학 수업은 절반만 이해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이제야 영어 스트레스는 없겠구나 했지만 취직을 한 뒤 직장동료나 상사가 하는 말들도 단어들은 이해했지만 저 문장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럴 때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봤고 친절한 동료들은 캐나다에서는 이런 경우에 이렇게 말한다며 설명해 주곤 했다. 그 후에도 병원에 갈 때, 세무서를 상대할 때, 면접을 볼 때마다 처음 듣는 관용구들이 나타났다.


어른들은 아이들은 머리가 덜 굳어 있어서 언어 습득이 빠르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이민 온 지 30년이 넘었지만 시장을 보는 이외의 경우의 영어는 거의 하지 못한다. 어른이 되면 외국어를 배우기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중학교 때 이민 왔어도 시청에서 서류 작성도 버거워하는 1.5세도 부지기수다. 아이들이 어른보다 영어를 빨리 배우는 이유는 학교라는 환경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하기 싫어도 영어를 배워야 한다.


반면에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가게를 운영하고, 장을 보고, 여행을 가는 데 쓰는 영어는 백 마디도 안될 것이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한국말로 가족과 이야기하고, 한국 교회에서 한국말로 예배를 드린다. 어른들은 남이 영어공부 하라고 떠밀지도 않으니 몇십 년이 흘러도 벙어리에 귀머거리들이 많다. 오래된 이민자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영어는 안 늘고 한국말은 줄어."  이민자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캐나다에 온 지 20년이 넘어도 매일 한국 방송을 보고 한국 친구들만 있는 사람들은 여권 신청서 따위를 작성하는 것도 버거워했다.  


소통하는 데 불편한 걸 참지 못하고, 새로운 환경에 놓이는 걸 기피하지 않는 사람들의 영어실력은 대부분 우수하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고, 남에게 뭐라고 표현을 못해도 참을만한 사람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 벙어리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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