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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Jan 22. 2024

우리는 매일 조금씩 죽어간다

1991년

91년의 일상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주중에는 학교를 다니고, 주말에는 가게일을 돕고 교회를 갔다 오고 하면서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것 같았다. 가게는 내가 보기에도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생전 남한테 물건을 팔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장사 같은 것은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사람이나 하는 줄로 생각했었다. 옛날에는 회사 다니는 남편을 둔 어머니들은 자기 아이들에게 장사하는 집 아이들이랑 놀지 말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장사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책 한 권 읽어보지 않고 가게를 시작했으니 잘 될 리가 없었다. 


음식은 맛이 없었고 팔리고 남은 재료들이 아까워서 얼렸다 다시 내놓기를 반복했으며 가게에는 옆 정육점에서 넘어온 바퀴벌레들이 드나들었다. 하루는 손님이 돈을 내다가 계산대 앞을 지나가는 바퀴벌레를 잡아 준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조언 같은 건 귀담아듣는 성격이 아니어서 뭘 좀 시도해 보려고 하면 영어도 못하면서 가만히 좀 있으라고 핀잔만 날렸다. 팔다 남은 샌드위치는 내가 학교에 점심으로 가지고 갔다. 운이 좋을 때는 가끔 로스트비프 샌드위치 같은 게 얻어걸릴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점심은 계란 샐러드 샌드위치와 테트라팩 주스였고 계란 샐러드 샌드위치를 먹으면 이상하게 금방 배가 고팠다. 


일은 점점 많아졌고 하루 일과가 끝난 뒤 집에서 밥을 다시 차리는 건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식사도 점점 부실해졌다. 하루는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서다 교회에서 쓰러지는 일도 있었다. 과로에 몸살이 겹친 탓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른 방법을 모색할 정도로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냥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집에서 틈만 나면 자신이 사우디에서 모래폭풍을 만나서 살아남았던 이야기, 미국 대기업의 텍사스 출신 엔지니어들에게 인정받았던 이야기, 대학교 2학년 때 겨울 설악산에서 조난당한 교수님의 시체를 수습한 이야기 등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하도 똑같은 이야기들을 자주 해서 나는 혹시 아버지가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현실이 시원찮으면 꼭 옛날에 잘 나갔던 시절을 되새긴다. 나는 그 때문에 예전 내가 잘 나갔을 때의 자랑은 웬만하면 하지 않는데. 그건 나의 현재 상황은 시궁창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술은 잘 못하셨지만 담배는 많이 피우셨다. 담배 좀 끊으라고 어머니가 타박할 때마다 자신은 감기 한번 걸린 적이 없는 건강한 사람이니 걱정 말라고 했다. 40대의 남자들은 종종 자신의 건강상태를 과신한다. 늙어 본 적이 없고 아파 본 적이 없으니 이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아버지가 가게에서 음식 재료 준비를 하다가 자신의 엄지손가락에서 돼지고기 냄새가 난다고 계속 불평을 했다. 아버지의 주 업무는 돼지고기를 망치로 쳐서 얇게 펴는 것이어서, 고기를 많이 만져서 묻었겠거니 했지만 아버지는 손을 계속 씻으며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점점 아버지가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몸이 좀 불편하다며 몸살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어머니는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니 병원에 가 봐야 될 거 같다고 했고 그때 우리는 앰뷸런스를 부르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직접 운전해서 지나다니다 봐 둔 근처의 종합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어머니의 국제운전면허증은 만기일이 일주일 정도 지나 있었다. 사람들은 가족 중 하나가 무언가에 서투르면 잘하게끔 가르치고 기다려 주지 않고 아예 그 일을 대신 해 준다. 가족 간에는 나와 타인이라는 구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해야 되는 일도 자기 일인 양 부모들이 다 처리해 준다. 그러고 나서는 아이들이 마흔이 넘어도 왜 철이 들지 않는지 의아해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운전실력을 못 미더워했고 캐나다 운전면허증을 딸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민 와서 운전을 그때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영어도 못하는데 사고라도 나면 어쩔 거냐며 운전대는 항상 아버지가 잡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건강히 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머니는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밤에 나를 옆에 태우고 주위를 살피게 하면서 거북이 속도로 병원에 겨우 도착했다. 병원 접수처에서 의료보험 카드를 보여주자마자 아버지는 정신을 잃었다. 의사들은 아버지를 데리고 들어갔고 학교에서 겨우 의사소통만 되는 내가 통역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곧바로 입원이 되었고 운이 좋게 2인실로 배정이 되었다. 옆 침대에는 배에 복수가 차서 숨을 헐떡거리는 노인이 있었다.


어머니는 교회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고 그중에 어느 친절한 아줌마가 달려와서 병원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아줌마는 캐나다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검사결과가 나올 것이고 별일 없을 것이라고 했다. 병원 식당에서 사 먹는 밥은 매우 맛이 있었다. 먹을 걸 좀처럼 사 주지 않는 어머니였지만 그날은 이것저것 먹으라고 식판에 음식을 담아 주었다. 어머니가 돈을 내려고 하자 아줌마가 대신 계산을 해 주었다.


아버지의 병명은 결핵성 뇌막염이었다. 의사 말로는 아마 옛날에 걸린 결핵균이 잠복해 있다가 몸이 약해진 틈을 타서 발병한 것 같다고 했다. 세균성인 것 같아서 항생제를 투여하고 있지만 생존할 확률은 반반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 몇 주동안 아버지는 의식이 돌아오고 나가기를 반복하면서 가족들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고 계속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면서 욕을 했다.  아버지는 인생에 불만이 많은 듯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인사하라고 수화기를 넘겼는데 아버지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욕설과 함께 빈정거리기만 했고 나는 그냥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는 매일 병원으로 출근했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왔고 그동안 가게는 다른 한국 아줌마가 봐주었다. 세상에는 그렇게 가끔 가다 친절한 사람들이 꼭 있다.


아버지도 무작정 온 이민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돈은 떨어져 가고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파티 같은데 초대를 받아도 없어 보일까 봐 쌓인 음식은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와인잔만 들고 웃다가 집에 와서 밥을 퍼드시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딱히 안 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듯 대부분의 불행은 자업자득이고 이건 남이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짐을 지고 산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런가 보다 했다. 어차피 운명이 다 해서 돌아가시는 거고 천국에서는 팔리지도 않는 샌드위치를 만들면서 매일 집에서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까. 천국에는 슬픔이 없다니 우리만 참으면 아버지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장 운전을 할 사람이 없어지긴 하겠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을 것이다. 캐나다는 사람을 굶어 죽게 내버려 두는 곳은 아니니까.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정말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해도 나에게 큰 충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는 매일매일이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어서 많이 무감각해져 있었다. 


어머니는 한국에서 취미로 유태우 박사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고려 수지침이라는 곳에서 열심히 수지침을 배웠었다. 회비는 따로 없고 책을 사면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는데, 처음에는 그럴싸하게 시작했는데 나중에 갈수록 내용들이 황당무계해졌다. 무게추를 손바닥 위의 기가 허한 혈자리 위에 매달아 놓으면 추가 떨린다던지, 염파요법이라고 마음속 생각으로 타인의 병을 고친다던지 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가르칠 게 바닥나니까 아무거나 주워섬기는구나 싶었지만 어머니는 수지침의 효능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매일 가서 수지침을 놓고 압봉을 붙였다. 의사들은 그걸 보고 언짢아했고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어머니는 그래도 몰래몰래 열심히 수지침 치료를 했다. 그러기를 한 달 반이 지났고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낫게 되었다. 부모님은 이게 다 수지침과 기도 덕이라고 믿었다. 병원에서 해준 거래 봐야 기껏 항생제를 링거로 투여한 거밖에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사람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혼수상태였던 동안 자신이 꾼 꿈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지구를 날아다니다가 김일성도 만났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봤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그래 요새는 뭐 하냐 하길래 앞치마 둘러매고 샌드위치 만든다는 말을 하기가 창피해서 그냥 일하고 있어요 하고 얼버무렸다고 한다. 조상신을 만나서도 체면은 차렸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러려면 그냥 여기로 와라 했지만 아버지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 아버지의 병실 이웃은 죽었다. 배에는 복수가 계속 차서 남산만 해졌고 입은 딱 벌린 채로 굳어 있었다. 간호사가 바빠서 병원에서는 그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고 나는 그동안 창백한 노인의 잿빛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죽으면 저렇게 얼굴이 회색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병원에 두 달 가까이 누워 있었던 탓에 다리의 근육이 다 빠져서 걷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를 부축하고 병원을 나섰고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병원의 이곳저곳에 있는 설비들을 가르치면서 저런 건 70년대에 개발되었는데 독일제가 제일 좋다는 둥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서 나는 잠시 병이 재발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며칠 쉬자 원기를 회복하셨다.  아버지는 퇴원하면서 간호사에게 돈은 어디다 내야 하나 하고 물었지만 공짜라는 말을 듣고 입을 딱 벌렸다. 캐나다는 시민권자나 영주권자에게는 무상의료이기 때문에 한국처럼 로비에 원무과가 없었다. 아버지는 공짜로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캐나다를 몇십 년 동안 고마워했다. 그 후 내가 취직을 하고 월급의 반을 나라에서 세금으로 가져간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버지가 진 빚을 아들이 갚는 격이구나라고 혼잣말을 하셨다.


91년 당시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였다. 어머니 말로는 그때 기도를 하면서 30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딱 30년 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를 응급실로 모시고 같이 검사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서 검사장비들을 가리키면서 저걸 최초로 개발한 회사가 독일의 바쉬엔롬이라는 회산데... 하고 중얼거리셨다. 지난 십몇 년 동안 아버지는 크고 작은 이유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이번에는 왠지 예감이 달랐다. 나는 결국 돌아가시게 되더라도 딱 일 년만 더 살다 가시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30년 전보다 아버지가 덜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이제 나는 모아둔 돈도 조금 있으니 드시고 싶은 것 정도는 얼마든지 사다드릴 수가 있고 일년 동안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가 가고 싶다는 곳을 모시고 다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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