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십대 시절의 나는 돈이 없었지만 필요하지도 않았다. 나가서 뭘 사 먹는 일도 없었고 갖고 싶은 것도 딱히 없었다. 그런데 내가 왜 맥도널드에서 일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 내 생각에는 그런 곳에서 조금만 일해도 떼돈을 벌 수 있지 않겠나라고 생각한 거 같다. 돈을 벌면 쓸 데는 없지만 마음은 왠지 든든할 것 같았다. 당시 밴쿠버의 최저임금은 4불 75센트였다. 하루 8시간을 일하면 40불이 조금 안되게 벌 수 있었지만 나에게는 큰 액수였다. 첫 월급은 나의 계산보다 한참 모자랐고 점장은 나에게 모든 월급은 세금을 떼는 법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ESL시간에 홍콩에서 온 친구에게 했더니 자기도 마침 맥도널드에서 일하는데, 자기가 점장에게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홍콩에서 온 아이들은 어딜 가든지 자기네들끼리 똘똘 뭉쳐 다녔다. 쪽수가 모자란 한국아이들은 중국 아이들 무리에 끼어 다녔고 걔네들도 그걸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그 뭐랄까, 친한 친구에게는 물불 안 가리고 도와주는 습성이 있다. 중국이니까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끼리 도원결의도 하고 나라도 세우는 삼국지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거지 한국이었다면 유비 관우 장비 셋 중에 한 놈은 분명히 처자식 핑계 대면서 의형제고 뭐고 배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지에서도 볼 수 있듯 중국에서도 친구가 아닌 사람들끼리는 온갖 모략과 거짓이 난무한다.
그는 아시안들은 다 같이 동양에서 온 형제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했다. 항상 나에게 무슨 도움을 주지 못해서 안달인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유비도 별 능력도 없이 빌빌거리는 인간이었지만 관우 장비 같은 인재들이 형님형님 하면서 붙어 다니지 않았는가. 간혹 그렇게 이유 없이 잘해주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나는 곧 면접을 봤다. 점장은 수염이 많이 나고 터번을 쓴 중년의 인도인이었다. 나는 정성스럽게 이력서를 써 갔고 점장은 일은 오래 할 거냐, 영어는 문제없냐 등등 전반적으로 시시한 질문을 했지만 나는 원래 작은 질문에도 과민반응하는 성격이어서 맥도널드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겠습니다 하고 강하게 어필했다. 터번을 쓴 인도 아저씨들은 대부분 자존심을 세워 주면 매우 만족해하기 때문에 다루기가 쉽다. 점장은 조금 생각하는 것 같더니 그럼 다음 주부터 일을 하러 나오라고 했다. 첫 직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맥도널드에서 면접에 떨어진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힘들어서 몇 주 못 다니고 때려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때는 아이들이 그런 곳에서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부모들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영어도 배우고, 문화도 익히고, 무엇보다도 돈이 공짜로 굴러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기에는 알바만 한 게 없다. 요새 한인 부모들은 공부만 잘하면 됐지 어떻게 애를 그런 험한 데 보내서 푼돈 벌어오게 하느냐는 말을 한다. 아마 이민을 올 정도면 보통보다 많이 풍족한 집안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한다. 남의 돈을 먹는 건 쉬운 일이 아니고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일찍 알게 될수록 좋다. 그런 사실들은 경험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 있다는 애새끼들 한 달만 노가다를 시키면 한 70프로는 싹 다 나을 거라고.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처음에 맡은 일은 피자를 굽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맥도널드에서 1인용 피자를 만들어서 팔 때였다. 치즈는 한 주먹, 페퍼로니는 세 개, 파프리카는 다섯 조각... 가끔 반쪽짜리 페퍼로니가 집히면 하나를 더 놓곤 했지만 언젠가 본사에서 감독관이 나와서 그것을 지적했고 점장은 나에게 반쪽짜리가 나와도 절대로 더 넣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치킨너겟은 조리한 뒤 30분인가가 지나면 폐기하게 되어 있었다. 내가 시작할 때만 해도 정말로 타이머가 울리면 서랍에서 너겟을 꺼내서 쓰레기통에 쏟아부었다. 아직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 걸 보고 나는 경악했고 먹을 걸 버리는 놈들은 천벌을 받을 거라는 아버지의 말이 맴돌았다. 하지만 맥도널드는 천벌은커녕 날로 성장하는 회사였다. 그런데 요새는 보니까 햄버거 패티도 미리 구워놓았던 걸 다시 데워서 내놓는 것 같다. 세월이 지날수록 회사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치사한 짓을 한다.
맥도널드에서는 휴식시간 이외에는 앉아 있는 건 금지였다. 항상 서서 일을 하거나 바삐 움직여야 한다. 괜히 맥도널드가 대기업이 된 게 아니다. 하지만 직장이란 그런 곳이다. 물정 모르는 어린애들은 대기업에 취직하면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구글에 입사한 사람은 자신이 구글처럼 대단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회사도 사정이 좋을 때는 복지니 수당이니 퍼 주고 항상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산은 여러분들입니다" 하며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당신은 그냥 부속에 불과하다. 그래서 테크 업계에 해고 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많은 이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우리가 제일 소중하대매! 이제 난 뭘 먹고살라고!"
회사는 당신이 필요해서 뽑은 거지 연애를 하려고 뽑은 게 아니다. 언제든지 당신은 잘릴 수 있다. 비즈니스란 그런 것이다. 꼴 보기 싫다고 내다 버릴 수 없는 건 가족 밖에 없다.
사실 일이 고된 건 내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부터 나에게 "누가 너에게 백 원 월급을 주는 건 네가 150원을 벌어다 주기 때문이야. 백 원어치만 일해주면 뭐 하러 그런 사람을 쓰겠니" 하고 누누이 말헀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일을 시키면 그보다 조금 더 일을 했다. 나는 생각 없이 하는 단순노동이 너무 좋았다. 머리를 쓸 필요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다. 시키는 것만 몇천 번 같은 동작으로 반복하면 된다. 단순노동은 머리를 깨끗하게 해 준다. 인공지능 때문에 단순노동 직종이 사라지게 된다면 세상은 정말 불행해질지도 모른다.
맥도널드에서는 계산대를 윈도라고 불렀는데, 사람들은 몸이 편하다고 다들 윈도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맥도널드의 금전출납기는 버튼이 백개도 넘어 보였고 버튼마다 깨알같이 메뉴가 쓰여 있었다. 손님이 주문을 하면 재빨리 맞는 버튼을 눌러야 했다. 잘못 누르면 어떡하지, 영어를 못 알아듣고 버벅거리면 어떡하지, 손님이 짜증 나서 소리치면 어떡하지 등등의 걱정으로 가득한 나는 매니저에게 나를 제발 계산대에 배치하지 말아 달라고 했고 매니저는 그래도 한번 시켜보더니 자기가 보기에도 아니다 싶었던지 그다음부터는 시키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길에서 깔깔거리면서 지나가면 나를 보고 비웃나 싶어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쪼다였고 만성 위염 때문에 구취가 심해서 말할 때면 항상 입을 가리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이런 내가 손님들을 상대한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반면에 사람들이 제일 기피하는 업무는 청소였다. 아무도 테이블을 닦고 화장실에 걸레질을 하고 쓰레기를 모아다 버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청소를 정말로 좋아했다. 사람들이랑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고 다른 사람의 페이스에 맞춰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청소 담당은 지점당 한 명이면 충분했기 때문에 나는 쉴 새 없이 매장을 살피면서 비질을 하고 콧물과 가래로 막힌 싱크대를 뚫고 무거운 쓰레기봉투를 압축기에 던져 넣었다. 가끔은 엄마들이 아이를 데려와서 우리 아이 교정기를 빼놓고 먹다가 실수로 버렸는데... 하고 달려오면 같이 쓰레기장에 가서 봉투를 하나하나 풀면서 같이 찾기도 했다.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식으로 먹고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 또래의 점원들은 가끔 불량서클에 가입했다고 으스대기도 했다. 그중에 한 명은 무슨 이유에선지 나를 따라다니면서 줄기차게 놀려댔고 자기 친구들을 데려와서 두들겨 패주겠다고 얼러댔다. 나는 무언가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장의 지하실에는 손바닥만 한 탈의실이 있었는데 대개는 옷을 갈아입고 라커에 소지품을 넣고 자물쇠를 채워두었다. 그런데 급한 경우에는 옷을 그냥 대충 쑤셔 넣고 잠그지 않고 나갈 때도 있었다. 하루는 그 불량배 꿈나무가 라커룸 벤치에 새로 산 겨울패딩을 대충 팽개쳐 놓은 것을 보았다. 나는 커터칼로 패딩을 대여섯 번 그어놓고 퇴근을 했다. 의심받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나는 항상 커터칼을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그날 이후로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라고도 생각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매장에서 못살게 굴던 애가 나 말고 몇 더 있어서 쉽게 단정 짓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고2가 끝나가던 시점에 나는 맥도널드를 그만두었다. 돈은 조금 벌었지만 사실 나에게 남은 것은 월급을 한두 달 모아서 산 워크맨 하나 밖에 없었다. 나머지 돈은 오락실을 가고 맥도널드를 사 먹고 하면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곳에는 나처럼 용돈을 벌어보려는 청소년들, 다른 나라에서 막 이민온 영어를 못하는 아줌마 아저씨들, 마땅한 기술도 없고 일자리도 없어서 그냥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맥도널드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게 된 20대들, 그리고 가끔 무슨 인생을 살았는지도 짐작되지 않는 마르고 닳은 얼굴의 30대 후반 아저씨들이 있는 곳이었다. 어쩌다 시급이 50센트 오른다던가 남은 음식을 몰래 가져가는 것 이외에는 즐거움이라고는 그닥 없는 그런 곳에서 일을 하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다. 하지만 부모들이란 아이들이 세상을 혼자 배우는 것을 방해하고 싶어 하는 법이다. 어수룩한 내가 그나마 그런 곳에서라도 일하지 않았었다면 대학 5년 동안 혼자 자취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온실 속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곱게 살게 하다가 아이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책임을 아이의 배우자에게 떠넘기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