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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Mar 15. 2024

자식은 돈이 많이 든다

1991년

해외에 사는 친구나 친척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걸 빌미로 자기 애들도 해외로 유학을 보내고 싶어했다. 유학은 원래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가야 하는 것이지만, 아이들이 공부를 못할수록 해외로 보내고 싶어 하는 부모들의 열망은 더 타올랐다.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예체능을 알아보고, 예체능도 소질이 없으면 해외로 보내는 게 웬만큼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공식이었다.


외삼촌은 아버지와 같은 회사에 다녔는데, 실력도 있고 근속연수도 높았지만 만년 부장이었던 이유는 성격 때문이었다. 수틀리면 상대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싸워댔다. 겁이 많은 사람들은 회사에서 윗사람에게 대들면 그 자리에서 잘리는 줄로 생각하는데, 사실 큰 회사에서 사람을 자르는 건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나중에 인사상 불이익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상식을 깨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 마련이고 그런 사람들은 괴롭힘 같은 건 별로 개의치 않는다. 외삼촌도 그런 사람이었다. 외삼촌은 매사에 철두철미했고 어디 며칠간 다녀올 일이 있으면 아이들이 게임만 밤새워할까 봐 컴퓨터 전선줄을 뽑아갔고 차를 몰고 맘대로 쏘다닐까 봐 차의 주행거리를 적어가는 사람이었다. 


외삼촌네 둘째 형은 축구 쪽으로 소질이 있어서 고등학교 감독들이 찾아와서 축구부에 들라고 권유도 했었지만 외삼촌의 생각에는 체육은 돌대가리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러나 나름 현실감각도 갖고 있는 분이라 애들의 학업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외삼촌은 그제야 캐나다로 이민을 오기로 결심하였다.  처음에는 둘째 형을 중학교 졸업 후에 미국 뉴저지에 사는 큰 이모네로 보내서 조기유학을 시도했었는데, 얼마 못가서 도저히 못살겠다며 도망나오는 바람에 큰이모와의 사이만 틀어지고 말았다.


70년대에 이민을 간 큰이모는 30년전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한국 드라마라고 보는 건 전원일기뿐이었고 너는 한국에서 공부를 못해서 왔으니 여기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지 명문대에 들어간 큰이모의 아들들처럼 남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소리를 매일 설교처럼 늘어놓았다. 저녁상을 물리면 큰 이모부가 어른의 지혜를 나눠준답시고 별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기도 했다. 머리를 기르면 장발족 같다고 한소리를 했고 한국에서 입고 간 옷은 웨이터 같다며 단정하게 입고 다녀야 한다고 타박을 했다. 이모네 사촌형들은 그렇게 조져대서 잘 컸을런지는 몰라도 그런 게 통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미국 유학이 일단 실패로 돌아가자 외삼촌은 우리에게 부탁을 했다. 사람 좋은 아버지는 아 형님 뭐 문제 될 게 있겠습니까 하고 호기롭게 허락을 했고 어머니도 작은오빠가 부탁하는데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싫었다. 나는 형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집에 누구를 초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한국에 있었을 때는 나름 친했던 사촌형이지만 같이 산다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나는 집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게 싫다. 내 인생을 통틀어 그나마 가장 편했던 시기는 자취를 했던 대학생 시절이었다. 생각해 보면 길게는 2주 정도 말을 한마디도 안 한 적도 있었다. 세상에는 남과 부대끼면서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지만 떠들썩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한다.


남의 부탁이라면 만사를 제쳐놓는 아버지는 이곳저곳에서 유학원과 기숙학교들의 팸플릿을 얻어서 외삼촌에게 보내주었다. 유학생을 상대로 하는 장사는 인기가 좋았다. 팸플릿을 보면 최고의 시설에서 세계 각지에서 모인 인재들과 같이 최고의 교수진 아래서 공부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었지만, 실지는 쇼핑몰 2층을 빌려서 애들 그림책이나 갖다 놓고 영어를 가르치는 수준이었다. 물론 정부의 인가는 받은 학교이기 때문에 언어가 된다면 그런 곳에서도 고등학교 정규과목을 이수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일반 고등학교보다 쉽게 가르치기 때문에 점수를 받기도 쉬워서 대학 진학도 쉬웠다. 물론 본인이 공부를 한다는 가정하에서 그런 것이고 대체로 그런 학교에는 집에 돈은 많은데 공부를 못해서 부모가 해외로 보내버린 아이들이 득시글했다. 학비는 당시에도 학기마다 몇천 달러였고 거기다 홈스테이 비용이나 자취비용까지 계산하면 여간 있는 집 자식이 아니고는 쉽지 않았다. 간혹 혼자 살면서 고급차를 몰고 고급 콘도에 사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나중에는 "쟤는 아빠가 무슨 기업 회장이고 엄마는 첩이래" 하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결국 사촌형은 우리 집에 왔고 생각보다 캐나다 생활에 적응을 잘 했다.  한 번은 자기 방문에 여배우의 대형사진을 붙여놓았었는데 옷도 다 제대로 입은 사진이었지만 그런 걸 처음 보는 우리 부모님은 기겁을 했고 예수님 믿는 사람이 이런 여자 사진을 붙여놓으면 어떡하니 하는 어머니의 훈계를 듣고 사진을 떼었다. 외삼촌네가 이민오고 난 후 그 사진은 다시 사촌형의 방에 걸렸고 그걸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외삼촌네를 보고 우리 부모님은 적잖이 놀랐다. 부모님이 물정도 모르고 생각보다 꽉 막혔다는 걸 알아차린 사촌형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나에게 돈을 잘 썼다. 한국 문화중에 맘에 드는 것 중에 하나는 나이먹은 사람들이 아랫사람들한테 돈을 잘 쓴다는 것이다. 나는 어딜가나 막내였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덕을 많이 봤다.


그런데 둘째 형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외삼촌을 닮아서 싸움꾼이었고 외숙모를 닮아서 호들갑이 심했다. 나에게 틈만 나면 동네 합기도 관장님을 졸라서 살인기술을 배운 이야기, 옆 학교에 싸움 원정을 간 이야기, 부탄가스랑 본드를 했는데 손에서 레이저가 나와서 친구들끼리 서로 쏘아대고 놀았다는 이야기 등을 했다.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여자친구를 다시 보고 싶다고도 했다. 여자친구는 동네 교회 목사님의 딸이었는데 고2이지만 육덕지고 발랑 까졌기 때문에 자기 취향에 딱 맞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나에게 사실 자기도 봉천동 살지 않고 나처럼 8학군 동네에 살았었다면 공부 까짓 거 일도 아니었을 거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사촌형은 곧 학교에 흥미를 잃었고 수업을 가는 대신 친구들과 놀러 다녔다. "야, 고등학생한테 유치원 영어책 나눠주고 아이엠어 보이부터 시키는데 너 같으면 좆같아서 다니겠냐?" 하고 변명을 했지만 그렇다기엔 얼핏 본 사촌형의 시험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외삼촌네는 그 후 캐나다로 이민을 왔고 외숙모는 큰아들이 이제야 공부를 제대로 한다며 우리 아들 박사까지 할 거라고 자랑을 늘어놓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아줌마들이 자기 자식 자랑하는 것의 한 절반은 그냥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큰형은 요리사가 되었고 작은형은 군인이 되어서 살고 있다.  그래도 자기 쓸 것은 자기가 벌어서 먹고 산다.


그나마 외사촌형은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의리도 있어서 나중에는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몇 년 후에 우리 집에 온 고모네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 고모와 고모부는 둘 다 의사였지만 그집 아들들도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다. 큰 형이 대입에 실패하자 큰형은 미국 친척네로 보내고,작은 형도 고등학교 졸업 후 캐나다의 우리 집으로 왔던 것이다. 고모는 쓸데없는 잡동사니 선물을 택배로 잔뜩 보내면서 간곡히 부탁을 했고 누나의 아들이 온다는데 아버지는 싫은 기색을 낼 수 없었지만 옛날부터 자기밖에 모르는 작은형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별로 탐탁지 않아 했다.


작은형은 우리 집에 와서 한 달을 같이 지내다 불편하다고 홈스테이를 얻어서 나갔다. 한국서 호화롭게 살다가 캐나다의 돈 없는 외삼촌의 작은 집에서 사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홈스테이도 몇달 살다가 집주인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물론 학교는 건성으로 다녔고 한국서 풍족하게 보내준 돈으로 온갖 취미생활을 했다. 뱀도 키우고 당구도 치고 언젠가는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일본인 여자친구를 데리고 우리 집에 인사를 오기도 했다. 고모는 아들이 뭘 하든 주님께서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실 줄 믿사옵니다 하면서 아낌없이 돈을 보냈지만, 주님의 계획에는 사촌형이 제대로 학교를 졸업하는 시나리오는 없었다. 동네 초급 컬리지를 전전하며 몇 년을 그렇게 놀면서 보내다가 결국에는 한국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고, 군대를 가야 했지만 듣도 보도 못한 찬물 알레르기를 가졌다는 게 밝혀져서 면제를 받았다. 세상에는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


고모의 큰아들은 미국 가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인교회 부목사가 되었다. 한인교회 부목사 월급이라는 건 별로 보잘것 없기 때문에 고모가 아직도 사십이 넘은 아들 가족의 생활비를 대고 있다고 아버지가 한탄했던 기억이 난다. 십여 년 전에 미국에 갔을 때 그 집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수영장이 딸린 좋은 집에 살고 있었다. 이게 다 고모 돈이겠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고모는 아들이 목사님이 되어서 자랑스러운 것 같았고 아들에게 주는 돈을 선교헌금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아들은 한국서 뭘 하는 것 같긴 한데 잘은 모른다. 그래도 둘 다 결혼해서 자식도 낳고 잘 산다. 조건이 좋고 번듯한 직장이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은 매력이 없는 찐따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무직의 놈팡이라도 기타 잘 치고 말 잘하면 여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거기다 얼굴까지 반반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해외에서 학벌을 돈으로 사서 한국으로 다시 오는 수법은 한때 매우 인기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학도 못 나오고 빌빌거리던 교포 아이들도 한국에 가면 영어 좀 한다고 대기업에 쉽게 취직하곤 했다. 개중에는 나오지도 않은 대학을 나왔다고 구라를 쳐도 그냥 넘어갔던 경우도 있다. 내가 알던 또래의 교포 아이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나름 잘 나가는 검머외의 인생을 살고 있다. 지금은 그런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많은 부모들은 자기 자식은 비범한데 남들이 그걸 모르는 이유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거나 환경이 뒷받침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면서 아낌없이 투자를 하지만 남이 그러는 걸 보면 손가락질을 한다. 등잔밑이 어두운 것이다. "요즘 젊은것들은 힘든 일을 안 하려고 해, 나 때는 말이야..."로 운을 떼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도 그럼 공장에서 일해보려고 해요"라고 대꾸했다가는 "야 내가 너 노가다 하라고 이런 좋은 집에서 비싼 밥 먹이는 줄 알아! 그러려면 당장 나가!" 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돈만 그렇게 퍼부으면서 아이들이 언젠가 '저절로' 철이 들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낙관적이 아닐까. 개인의 능력은 적당한 결핍상태 아래서 극대화된다. 부족한 게 있어야 머리를 굴려서 해결할 환경이 되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편하게 살게 해주는 부모가 있다면 왜 철이 들겠는가? 


내가 본 한국인들의 특징은 뭐든지 돈만 처바르면 안 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돈이 많은데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돈이 더 많지 않아서라고 믿는다. 자식놈 일부러 고생하라고 돈들여서 해외유학 시키는 부모는 없다. 한국보다 편한걸 아니까 보내는 것이다. 그런 부모들은 대부분 솔직하지도 못하다. 애가 멍청해서 유학이라도 보내야지 어쩌겠어 하고 말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부분 "한국은 아이들이 자라기에 너무나 척박한 환경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부모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고 말은 번지르르하게 한다. 그런 기회를 주면 해외 나가서 한국애들끼리 한국 노래방에서 참이슬 마시면서 허송세월을 보낸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하긴 지금 교육부 장관 자식도 이중국적이라니 한국에서 아이들 키우기는 힘들다는 이야기가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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