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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Mar 28. 2024

연애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1991년


10학년이 되자 나는 학교에서 꽤 유명해졌다. 의외로 아이들은 친절했다. 영국에서의 경험으로 아이들이 누군가를 차별할 때에는 피부색이나 냄새보다는 자기들과 얼마나 소통이 잘 되는가를 따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처럼 외모에 따라 급을 나누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말이 통하고 분위기를 잘 맞출 줄 아는가에 따라 인기가 갈린다. 유럽이 북미보다 인종차별이 더 심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개방적인 북미보다 유럽 문화가 조금 더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문화를 모르면 대화에 낄 수가 없고 말을 못 하면 멍청한 놈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레 들기 마련이다. 몇 년 동안 같이 일했던 프랑스 출신의 직장동료는 "프랑스는 백인이 아니라고 차별하는 경우는 없어, 그러나 프랑스어를 못하면 비웃음의 대상이 되지"라고 했다.


아시아 이민자들의 아이들은 항상 자기네들끼리 몰려다녔고 딱히 새 친구를 만들려는 생각이 없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세상에는 괜한 모험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보다 안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나는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같은 아시안들끼리 몰려다니는 것이 조금 창피했다. 나는 백인들과 어울리고 싶었기 때문에 TV를 열심히 봤고 시트콤 같은 데서 써먹을 말이 나오면 외웠다가 한 마디씩 던지곤 했다. 어쩌다 말을 걸어오면 아는 단어를 다 동원해서 대화를 길게 길게 이어나갔다.


학교에서 내가 아이들과 잘 지낸다는 걸 알게 된 아버지는 그래 너도 나이가 됐으니 연애도 좀 많이 하고 그래라, 그런데 백인 마누라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된다라고 미리미리 쐐기를 박았다. 친가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걸 항상 강조했지만 아버지의 사촌 중에는 미군과 국제결혼을 한 사람이 있었고, 아버지는 그 사촌고모를 정신없는 미친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여기서 현지인과 결혼하는 게 쉬운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우리 집안에 백인을 들이는 것은 조상님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은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오면 대학에 교수로 취직하기가 쉬우니 여기서 박사를 따고 이화여대 교수로 들어가서 거기서 괜찮은 학생을 골라 결혼하라는 황당한 조언을 했다. 대학 친구들 중에서 공부 못하고 취직도 안 돼서 유학 간 놈들이 다 교수가 되어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장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런 말을 했던 걸로 봐서 아버지는 그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계획이란 건 다 그런 식이어서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 인생이 잘 안 풀리는 사람들의 유형중 하나는 현실성 없는 망상만 계속하면서 만족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망상을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 떠벌리면 마치 이루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러다 현실을 가끔 직시하게 되면 생각했던 것보다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에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대신 다른 망상을 시작하는 악순환을 계속한다.


그리고 나는 미묘하게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애를 제대로 해본 적이 거의 없다.  나는 남의 말을 문자 그대로 믿었고 농담인지 비아냥인지 구분하는 것도 힘이 많이 들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자원봉사 크레딧을 따려고 (당시에는 졸업을 하려면 학교에서 자원봉사를 몇 시간 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한 학년 아래 수학 수업에서 in-class tutor로 일을 했었다. 수업 도중에 아이들이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선생을 도와 가르쳐 주는 단순한 임무였다. 나중에는 선생과 같이 시험문제도 채점하고 방과 후에 숙제도 도와주곤 했다. 나는 남에게 뭘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튜터 일이 적성에 맞았고 의외로 아이들도 '동양에서 온 체크무늬 남방 입은 이상한 놈'이라고 비웃다가 점점 호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선생은 20대의 이태리계 다혈질 선생이었는데, 솔직하게 나에게 자신의 교육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여기 30명이 있지? 이 중에서 5명 정도는 내가 가르치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공부하는 애들이야, 저런 애들은 별로 해줄 게 없어. 그리고 그 밑에 10명 정도는 붙잡고 하나하나 가르쳐야 겨우 알아먹는 애들이지. 별로 똑똑한 애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노력은 하는 애들이야, 얘네들이 시간이 제일 많이 들어" 


" 그럼 그다음 열다섯 명은요?"


"걔네들은 그냥 바보새끼들이야, 머리에 든 것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아, 저런 애들한테는 시간낭비할 필요가 없어, 어디 가서 접시만 날라도 성공한 인생이지"


그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 중에 한 여자아이는 별것 아닌 문제도 뻔질나게 물어보다가 하루는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평소에도 나에게 장난을 잘 쳤기 때문에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딱 잘라서 거절을 했다. 그 아이는 상당히 귀엽게 생겼기 때문에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얘처럼 멀쩡하게 생긴 애가 왜?" 그러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날 쳐다보며 이유가 뭐냐고 물었고 순간 나는 '이거 진짠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래도 이왕 내뱉은 말을 바꾸는 것도 우습고 해서 '아 그냥 싫어서'라고 대답했다. 그 아이는 이후로 나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학교에는 peer counselor라는 제도도 있었다. 고민이 있으면 소정의 교육을 받은 또래의 학생과 쉬는 시간에 만나서 상담을 하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걸 자원해서 하는 아이들은 유달리 착하고 오지랖도 넓었던 것 같다. 그중에는 내가 꽤 예쁘다고 생각한 아이도 한 명 있었는데, 손해 볼 거 없다고 생각한 나는 상담을 신청했고 그 아이는 몇 주 동안 내 이야기를 차분히 듣고 공감해 주었다. 나는 이런저런 집안 이야기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답답한 소리만 하는 부모님과 성인이 된 후에도 형을 보살펴야 한다고 강요하는 집안 분위기에 대해서 이런저런 불평을 했던 것 같다. 확실히 남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면 마음은 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자기 얘기들을 해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것은 상담 자체는 사실 궁극적인 치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잠깐 답답한 마음이 풀린 것일 뿐이지 내일이 되면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있다. 공산당들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카운슬링이 끝난 뒤에도 계속 친한 척을 했고 카운슬러 소녀는 친절하면서도 프로페셔널하게 거리를 두었다. 아마 나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본 것 같았다. 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매우 서툴렀고 그래서 금세 누군가에게 빠지거나 하는 일이 잦았다. 남의 호감을 얻는 방법도 잘 몰랐기 때문에 식상할 정도로 찌질한 행동들도 많이 해서 남의 관심을 사려했고 그것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창피했던 부분들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글쓰기의 목적은 자기만족이 첫째기 때문에 굳이 남에게 옛날의 화끈거리는 경험을 꺼내놓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이것을 확실하게 밝혀놓지 않으면 나의 글은 전체적으로 설득력이 없어질 것 같다. 그리고 사실 누구나 찬찬히 뜯어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상당히 병신스럽다. 


나는 위생관념도 조금 희박했고 남들이 항상 나를 놀리려 한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면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속으로는 손주 이름까지 지을 정도로 음침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을 상대하는 경험을 많이 얻고 자존감이 높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부모 탓도 있을 테고 내가 타고난 성격이나 환경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니 내가 왜 이렇게 후진 인간인가에 대해 굳이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단점을 인식하면 빨리 고쳐나가는 것이다. 창피하다고 나의 단점을 모르는 척 뭉개고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아쉽게도 나는 너무 늦게 배웠다. 나는 문법이 많이 서툴렀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도 채점된 나의 영작 에세이를 받아보면 나의 까만 글씨만큼 선생님의 빨간 펜으로 쓴 교정문구들이 씌어 있었다. 나는 그게 창피해서 받자마자 읽어보지도 않고 가방에 집어넣곤 했다. 사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남들이 보건 말건 그걸 책상에 펼쳐놓고 여러 번 읽어보았다면 내 문법실력은 훨씬 빠르게 늘었을 것이다. 내 인생의 다른 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학교는 10학년까지밖에 없었기 때문에 학기말이 되자 아이들은 졸업파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처음에는 가지 않으려 했다. 남들이 즐겁게 어울려 노는 데 나만 우두커니 구석에 서 있던 경험들은 나에게는 많았다. 그런데 아이들은 나에게 파티에 가지 않겠냐고 끈질기게 물어봤고 내가 그 당시 괜찮다고 생각한 K라는 여자아이의 친구들이 눈치를 채고 "걔도 가는데... 너도 같이 가면 재미있을걸?" 하고 계속 눈치를 주며 졸랐다. 떠밀리다시피 해서 가게 된 나는 그래서 여차하면 일찍 돌아올 요량이었는데, 알고 보니 파티가 작은 유람선 위에서 열린다는 것이었다. 배를 타면 재미가 없어도 일찍 집에 올 수가 없다. 그런데 다행히도 여자아이들은 나와 앞다투어 춤을 추고 싶어 했고 남자아이들도 반갑게 수다를 떨었다. 내가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가 봐?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여기까지 왔으니 불쌍하다고 잘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K는 나에게 먼저 와서 춤을 권했고 나는 K와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K는 졸업 후에도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먼저 와서 말도 걸곤 했으나 우리는 학교가 달랐기 때문에 결국은 흐지부지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당시의 나는 그냥 아무나 닥치는 대로 좋아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한 적은 거의 없다. 뭔가 설명할 수 없지만 애매한 나의 조건을 충족하는 여자들은 다 좋아했던 것 같다. 어차피 혼자 좋아할 건데 한 명이면 어떻고 열명이면 어떤가.  주식투자처럼 유망주 여럿을 두고 보아야 그중에 하나라도 건질 확률이 늘어나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연애에 있어서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은 투자 대비 효율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금 만나는 사람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확률은 상당히 높다, 그러나 그런 사람과 이어질 확률이 높지 않다면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의 파트너에게 네가 최고라고 빈말을 해대는 것이 아닐까. 이건 모두들 알고 있지만 입밖에 내지 않는 사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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