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이 애를 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말을 할 때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애한테 돈 들게 뭐가 있어? 학교는 나라에서 보내주는 거고, 옷가지 좀 사고 식탁에 수저 한벌만 더 놓으면 되는 거 아냐?"라고 말씀하셨다. 아이한테는 어쩌다 크리스마스나 생일날에 선물 같은 거 사주는 정도만 감당하면 별로 들어갈 게 없다고 믿었고 이 믿음은 아버지가 노인이 되어서 집에 한국 방송을 놔 드렸을 때에야 없어졌다. 영어 방송은 거의 보지 않는 아버지가 그때까지 미디어를 접하던 창구는 마트에서 공짜로 나누어 주는 한인 신문이 전부였다. 그전에는 다른 집은 과외에 얼마가 들었고 입히는 거나 용돈도 기죽지 많을 만큼은 줘야 한다고 해도 "에이 웃기는 소리 말라 그래" 하면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소식은 언제나 조금 느렸다. 90년대 말까지 바바라 스트라이샌드를 "요새 할리우드 여배우"라고 불렀고 2021년에 자동차를 사려할 때 기름값을 절약하게 하이브리드를 사시라고 권하자 "하이브리드는 아직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검증이 안된 기술이야"라며 거부하셨다. 하이브리드가 나온 지 20년도 넘은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말년에 옛날 얘기를 종종 하면서 "사실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건 다 쓸데없는 짓이야, 애들은 자기 본성대로 자라게 마련이거든."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보기에는 아이들은 '뭐든지 혼자 알아서 하게' 키우는 것이 맞는 것이었고 괜히 이래라저래라 참견을 많이 하는 건 아무 쓸모없는 짓이었다. 이것은 아버지의 자라온 환경과 관계가 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1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나서 서울대를 가야 한다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압박에 시달렸고 실제로 고모들과 아버지는 모두 서울대 동문이다. 어렸을 때에는 매일같이 무언가를 잘못해서 할아버지에게 매를 맞았고 어쩌다 맞지 않는 날이면 뭔가 불안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원래 문과에 가서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할아버지는 신문기자란 놈들은 다 뇌물 받아먹는 쓰레기들이니 공대를 가서 나라를 세우는데 일조하여라 해서 억지로 재수 끝에 공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렇게 간 학교에서 공부를 할 리가 없었고 4년 동안 놀기만 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다들 졸업을 했다. 그렇게 자란 아버지는 남들처럼 결혼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우리들을 낳았는데 막상 아이가 생기니 더럭 겁이 났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는 그 때문에 자식의 진로를 억지로 정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역시 자식들에게 투자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애가 능력이 있으면 구태여 뭘 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거고, 뒷바라지를 뼈 빠지게 해야 크는 아이라면 어차피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장을 볼 때 항상 마트를 세 군데 이상 돌았다. 그리고 가장 많이 할인하는 물건들만 집었다. 어쩔 때는 "야, 아까 간 마트가 더 싼데 거기로 한번 더 가야겠다" 하고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었었지만 대개는 어머니가 매주 나오는 마트 전단지들을 면밀히 점검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적었다. 사실 한 군데에서 모두 장을 보면 시간은 한두 시간 더 절약할 수 있었지만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시간은 전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두시간 더 일하고 집에 가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더 일을 했고 30분 줄을 서서 천 원을 할인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던 사람들이다.
어머니는 뭐든지 제일 싼 곳에서 사지 않으면 역정을 냈다. 이민 온 지 1년이 되어가자 어머니의 생신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20불을 꺼내서 이걸로 엄마 케잌이라도 사와라 하고 몰래 나에게 말했다. 가까운 빵집은 걸어서 30분이었고 오르막길이었지만 나는 버스비 75센트가 아까워서 땡볕에 왕복 한 시간을 걸어서 Happy Birthday Mom이라고 써달라 부탁한 흰 생일 케이크를 사 왔다. 오면서 케이크가 흔들릴까 조심했기 때문에 팔이 매우 아팠다. 저녁에 숨겨뒀던 케이크를 꺼내고 생신을 축하한다고 하자 어머니는 이리저리 보더니 가격표를 보고 신경질을 냈다. "슈퍼스토어에서 블랙 포레스트 케잌이 8불 99센트인데 이딴 걸 15불이나 주고 사 왔어!" 맛을 보고는 한마디를 더 얹었다. "이거 어제 만든 건가 본데, 야 뻣뻣하고 맛대가리 없다." 우리는 서둘러 생일노래를 부르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어머니는 먹으면서도 계속 이딴 걸 이렇게 비싸게 사 왔냐, 평소에 마트 따라다니면서 뭘 본 거냐고 나에게 타박을 했다.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말을 생각나는 대로 내뱉으며 옛날 일을 꺼내서 두고두고 남을 비난하는 건 외갓집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친가가 학벌과 인맥을 중시하고 뭔가 차가운 분위기였다면 외가는 얼핏 화기애애했지만 교양이 전반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설날 같은 때 모이기라도 하면 서로 너는 왜 그 모양이냐 식의 타박이 일상이었지만 다들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후 우리는 어머니 생일에 마트에서 자신이 직접 고른 케이크만 먹었고 다른 선물 같은 것은 한동안 없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뿌린 대로 거두기 마련이라 본인들도 남에게 유쾌하지 않은 소리를 자주 듣게 되고 친구도 별로 없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친구가 없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에게 항상 친구란 건 있다가 없어지고 그러는 거니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늘 말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학교 컴퓨터실의 컴퓨터들이었다. 집에도 컴퓨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던 조합은 애플 트리니트론 12인치 컬러 모니터, 2MB 램과 20MB 하드가 내장된 애플 매킨토시 LC 본체, 그리고 휴렛패커드 500 잉크젯 프린터.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사양이었고 가격은 약 삼천달러였다. 학교 컴퓨터실에서 컴퓨터를 쓸 수 있긴 했지만 방과 후 두 시간 정도였고 학교 컴퓨터를 쓰려면 내 파일은 디스켓에 저장해야 했기 때문에 느리고 번거로웠다. 집에 컴퓨터만 있다면 숙제도 손으로 쓰지 않고 깨끗하게 인쇄해서 낼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조르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샌드위치를 한 달을 팔아도 삼천불은 못 번다며 너무 비싼데 그냥 학교 컴퓨터를 쓰면 안 되냐, 어차피 게임만 할거 아니냐, 우리 영국에서 살 때 컴퓨터 사줬더니 게임만 하던데 하면서 열 살 때 이야기까지 끄집어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초3이나 고1이나 똑같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컴퓨터가 뭐 하는 것이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그거만 있으면 학교에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이것저것 들은 말들을 주워섬겼다. 그리고 요새 컴퓨터 없는 집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실 다른 집은 아이들이 쓸 줄 몰라도 요새 집에 교육용 컴퓨터는 한대 있어야 한다는 말만 듣고 쓸 줄도 모르는 컴퓨터를 너도나도 들여놓을 시기였다. 어머니는 주말에 컴퓨터 매장에 같이 가서 점원이 시연하는 것을 보았다. 그림도 그리고 타자도 치고 계산기도 되고 애니메이션까지 만들 수 있는 걸 본 어머니는 저거 하나 사 줍시다 하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어머니까지 가세하니 아버지는 컴퓨터가 앞으로는 많이 쓰이긴 할 거라더라 하고 마지못해 승낙했다.
당시에는 캐나다화 대 미화의 환율이 낮아서 미국에서 사는 것이 몇백 달러 더 쌌다. 어머니는 미국에 사는 큰 이모의 아들에게 연락을 했다. 사촌형은 스탠퍼드 의대를 나오고 캘리포니아에서 전문의로 일하고 있었고 큰 이모는 입을 열 때마다 아들들 자랑을 침이 마르게 했다. 사촌형은 그 당시 20대 후반이었는데 벌써 결혼해서 벤츠를 몰고 다녔다. 사촌형 네 부부는 마침 몇 달 전에 알래스카로 떠나는 크루즈를 타러 밴쿠버에 와서 우리 집에서 며칠 묵고 가기도 했었다. 형수는 병원 약사로 일하고 있었다. 사촌형과 형수는 자기네들끼리는 혀를 많이 굴리는 영어로 대화했고 우리는 와 역시 미국물 많이 먹은 사람들은 다르구나, 명문대에 의사에 영어에 벤츠에 크루즈에...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 사람들 같다고 생각했다. 사촌형은 나에게 돈을 많이 벌려면 의대가 최고이고 너도 공부 잘하면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미국 한인들은 이상하게 캐나다 한인들보다 훨씬 더 돈돈거리는 경향이 있다. 어머니는 삼천 달러라는 큰돈을 - 하지만 사촌형에게는 그리 크지 않을 - 우편환으로 환전해서 사촌형에게 보냈고 나는 다음날부터 우체부를 기다렸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그다음주가 되어도 컴퓨터는 오지 않았다. 나는 조바심이 났고 3주째 되어도 오지 않자 불안증이 생겼다. 컴퓨터가 왜 안 오지 하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어머니는 이상하다 하면서 사촌형에게 전화를 했고 사촌형은 뜨악한 목소리로 "당장 필요한 건 아니죠?" 하는 말을 했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 애가 기다리다 병이 나게 생겼는데 당장 필요하니까 돈을 보냈지 하면서 타박을 했다. 어머니는 큰 이모에게도 전화를 걸었고 약간의 대화가 오간 뒤에 이제 보낸다니까 곧 도착할 거라고 나에게 말했다.
알고 보니 소비벽이 있는 사촌형과 형수는 급히 돈을 갚아야 할 데가 있었고 나중에 돈이 생기면 보내주면 되겠지 했던 것이다. 벤츠도 집도 다 빚이었고, 200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집값이 한때 폭락하자 사촌형은 집을 포기해서 한동안 신불자 신세였다고 한다. 큰 이모는 그후로 아들 자랑을 우리에게 한동안은 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컴퓨터가 도착했다. 애플은 91년도에 벌써 언박싱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박스를 열자 깨끗한 마분지에 축하합니다라고 써진 골판지가 있었고 그것을 들어 올리면 컴퓨터가 스티로폼 안에 아름답게 놓여 있었다. 매뉴얼도 다른 회사처럼 갱지에 아무렇게나 인쇄된 것이 아니라 스프링노트에 고급 재질의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살면서 온갖 물건을 많이 사 보았지만 그때의 애플처럼 포장에 신경 쓴 회사는 아직 보지 못했다. 지금의 애플 제품 포장은 그때에 비하면 많이 수수해진 느낌이다.
나는 그 컴퓨터로 많은 것을 했다. 망한 회사의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을 싸게 사서 그걸로 숙제를 했고 모뎀을 사서 전화선을 이용한 PC통신도 한참 했다. 게임 하나 다운받으려고 10분을 기다리다가 누군가 전화 수화기를 들면 에러가 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그런 시대였다. 그때는 1메가를 다운받으려면 8분이 걸렸다. 프로그래밍도 잠깐 손대 봤었고 나중에는 밴쿠버 애플 유저 모임에 회원으로 들어가서 활동도 했었다. 고3 때는 학교 학생회의 요청으로 재학생들 전화번호부도 디자인해서 만들어 주기도 했었다. 대학 전공을 컴퓨터로 정한 이유도 취직이 쉬울 거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컴퓨터가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컴퓨터를 사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