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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Dec 20. 2023

당신은 수포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1990년


어릴 때는 시간이 참 느리게 간다. 말도 못 알아들으니 학교에서의 하루는 매우 길었다. 아침에 30분을 걸어서 덥고 졸린 채로 교실에 들어가면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내리쬐었지만 냉난방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교실은 덥지도 춥지도 않고 그냥 밝기만 할 뿐이었다. 첫날 수업이 끝나고 여기서는 청소 당번은 어떻게 정하는지 몰라 집에 가도 되나 하고 머뭇거렸지만 아이들은 그냥 사라졌다. 나는 겨울에는 조개탄을 때우고 여름에는 창문을 여는 정도로 냉난방을 해결하던 학교에 다니던 세대에 속했다. 교실이나 복도는 물론 교무실 청소도 아이들이 도맡아 하던 시대였다. 장학사가 온다 하면 학생들이 총동원돼서 바닥의 껌을 자로 긁어 떼고 벽과 바닥이 반짝반짝하도록 윤을 내기도 했다. 캐나다의 학교에는 우리 집에도 없었던 에어컨이 있었고 청소는 월급을 받는 청소부가 도맡아 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고생하는 게 무슨 자랑처럼 여겨지던 시대여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된 한국 어른들은 "아이들을 저렇게 나태하게 키우니 우리 근면 성실한 한국인들은 금방 캐나다의 코쟁이 백인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구나" 하고 말했다. 이민 온 한국 사람들은 캐나다 현지인에게 이상한 열등감 같은 것이 있었고 뭐든지 남보다 덜 자고 더 일하기만 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따라잡는다는 것의 기준은 오직 돈이었다. 하지만 근면 성실만 강조하고 머리를 써서 더 효율을 올리려고 하면 꾀를 부린다고 타박하는 머슴 근성 때문에 죽어라 일해도 사실 그렇게 성공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정성, 인고의 세월, 피나는 노력, 희생과 봉사, 이런 것들이 절대선이었다.  사람을 많이 갈아 넣어서 굴러가는 경제구조에 걸맞은 구호들이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똑똑해져서 그런 말들은 싼 맛에 사람 굴리는 중소기업 사장들 아니면 좀처럼 하지 않는다.  


형과 같이 학교를 다니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형은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큰 소리로 중얼거렸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했다. 형과 같은 반에 있을 때 선생이 형에게 질문을 하면 내가 항상 통역을 해 주었다. 나중에는 선생들이 나에게 형이 대답하게 내버려 두라고 주의를 줬고 그러자 형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다른 시간은 그렇다 쳐도 체육 시간이 제일 싫었다. 우리를 자기편에 넣어주는 아이들은 없었고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있었기 때문에 항상 선생이 편을 정해 주었다.  경기를 할 때마다 형은 같은 편이란 게 무슨 뜻인지도 이해하지 못했고 선생이 계속 주의를 주자 신경질을 냈다. 선생들은 그런 우리를 점점 의심하기 시작했고 어느 날 형이 ESL 여선생을 만지자 학교에서는 부모님을 불렀다. 나에게는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지만 그 후로 형은 특수학급이 있는 다른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나는 그때야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은 오랫동안 정상인 흉내를 내면 정상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새 학교에 가는 형에게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가라고 시켰다. 형은 새 환경에 혼자 가는 것에 대해 심한 공포심이 있었고 그러다 어느 날 형이 학교에 도착한 후 스트레스로 기절을 하고 나서 여러 의사의 진찰 끝에 정식으로 특수교육을 받게 되었다. 


옛날에는 그냥 무작정 시키면 다 된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때리면 성적이 올라가는 것이었고 운동경기에서 지면 정신력이 모자라서 그렇다고들 믿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노인들이 되어서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보며 젊은 세대들에게 훈계라도 하고 싶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이다. 그래서 자기네들끼리 장문의 글을 페이스북과 동창회 게시판에 간간히 총천연색 꽃 그림과 같이 올리며 현자 행세를 한다. 할아버지들은 그러다 싫증이 나면 페이스북으로 알게 된 젊은 여자에게 이모티콘을 보내며 집적대기도 한다.  남자 노인들은 누구나 그렇듯 자기는 또래보다 젊어 보이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젊은 여자들이 자기를 남몰래 흠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을 하고 산다.  희망의 시대에서 청춘을 보냈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사실 문자와 영상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노인의 삶의 지혜 같은 건 이제 별로 설 자리가 없다. 그런 건 처세술 책이나 유튜브 채널에 모두 들어 있다. 세상은 예전보다 훨씬 더 빨리 변하고 있고 우리가 노인이 되는 시점에는 우리도 역시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형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자 그나마 마음 놓고 학교를 다닐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ESL 이외의 과목에서는 거의 소통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나름 다행인 것은 수학은 내가 한국에서 배웠던 수준보다 훨씬 쉬웠다. 캐나다에도 수포자는 흔했고 내가 보기에도 쉬운 수학인데도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나도 한국에서는 수포자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수학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선생은 칠판에 잔뜩 필기를 해 가면서 문제를 풀었지만 나는 군데군데 왜 저렇게 식이 나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손을 들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선생들은 어떤 부분은 일단 외우면 나중에 이해하게 될 터이니 지금은 이 방식을 외워서 문제를 풀라고 가르쳤다. 나의 구멍 난 이해력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수학은 성적을 올리려면 다른 과목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하지만 한 시간을 공부해서 국어를 10점 올릴 수 있고 수학은 5점밖에 얻지 못한다면 그냥 그 시간에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더 가성비가 좋은 게 아닌가? 하고 결론 내렸다. 어차피 공부하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잠을 줄이거나 해서 총학습량을 늘이려는 생각은 없었다. 중학교 공부 잘해서 대학 가는 것도 아닌데 왜? 하지만 수학은 기초가 중요한 학문이었고 그런 식으로 슬슬 내려가던 점수는 중 2가 되자 걷잡을 수 없이 낮아졌으며 그 사이 나는 자연스레 수포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캐나다의 수학 선생들은 수학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우선 수학은 외우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항상 했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계산기까지 쓸 수 있었다. 사칙연산에 통달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수학의 개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계산은 컴퓨터 시키면 된다"가 그 이유였다. 수업시간에는 문제를 풀기 전에 항상 왜 이래야 하는가에 대해 한참 설명했다.

나는 그 덕에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갔던 개념들을 다시 배울 수 있었고 그래도 이해가 안 될 때에는 선생을 찾아갔다. 수학 선생들은 항상 방과 후에 한두 시간씩 남아서 모르는 걸 물어보러 오는 아이들에게 다시 설명을 해 주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못하는 영어로 떠듬떠듬 물어보았지만 선생들은 친절했다.


얼마 지나자 나의 수학 등수는 학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기 시작했다. 친구도 없고 할 일도 없으니 그 시간에 수학문제나 푸는 것 이외에는 별로 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 년 정도가 지나자 나는 학교에서 항상 수학은 일등을 했다. 당시에는 Honor Roll이라고 우등생은 과목별로 성적순으로 이름을 적어 학교 게시판에 붙여놓았다. 내 이름이 자주 언급되자 아이들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선생은 나에게 캐나다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보라고 권유했다. 수학으로 유명한 워털루 대학에서는 매년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수학경시대회를 개최한다. 모든 경시대회가 그렇듯이 마지막 서너 문제가 어려웠는데 그렇게 대단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아마 내가 살던 노스 밴쿠버에서 10등 안에는 들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수학 선생이 컴퓨터도 같이 가르쳤는데, 학교에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실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최신식이었던 애플 매킨토시가 30대 넘게 있었고 프린터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한국 중학교에서도 컴퓨터실이 있긴 했지만 항상 잠겨 있었고 어쩌다 일주일에 한 번 특활시간에만 출입이 허용되는 곳이었다. 나는 컴퓨터가 예뻐서 만지작거리고 놀기 시작하다가 컴퓨터에 취미를 붙여서 오피스 프로그램도 다룰 줄 알게 되었고, 그러자 선생은 간단한 프로그래밍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원래 나의 장래희망은 항상 인문계 쪽이었고 그중에서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취재를 하는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이민을 오면서 그 꿈은 없어졌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여기 사람들만큼 영어를 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먹고살려면 그나마 뭔가 좋아하는 쪽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던 차에 수학과 컴퓨터에 흥미를 붙이게 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자기를 수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문과 머리, 이과 머리라는 건 사실 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 수포자들도 환경이 달랐다면 인생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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