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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Nov 22. 2023

이민 1.5세는 부모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좋다

1990년

캐나다의 학기는 9월에 시작해서 5월에 끝난다. 7월에 캐나다에 온 우리는 8월쯤 학교 배정을 받기 위해 사는 지역의 school board 란 곳으로 가서 면담을 했다. 사무관은 우리의 이민서류를 들춰보고 이것저것 간단한 질문을 했다. 처음에는 형은 나이가 있었기 때문에 12학년까지 있는 큰 학교에 배정을 받았고 나는 10학년까지 있는 작은 Junior Secondary에 배정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사무관에게 우겨서 형을 한 학년 낮추고 나와 같은 학교에 배정받게 했다.


"형 혼자 어떻게 학교에 보내냐, 네가 형을 데리고 다니면서 학교 다녀라" 며 아버지는 못을 박았고 나도 힘든데 어떻게 형까지 데리고 다니냐고 하자 동생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거 아니냐며 윽박지르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5세 정도의 지능에 영어도 전혀 모르니 일반 학교를 다니는 건 아무 소용도 없었지만 아버지는 그 시대 사람답게 학교에서 뭘 배워온다는 것보다는 다닌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었다.  언제까지 같이 다니게 할 것인지, 간혹 소란이라도 피우면 어떻게 할 것인지는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중요한 순간마다 타조처럼 땅에다 머리를 처박으면 어떻게든 지나가겠지 하는 식이었다. 지금의 일반적인 부모라면 담당자에게 일단 사정을 설명했겠지만, 그때의 사람들은 창피한 것은 무작정 숨겼다.


내가 여기서 느낀 것은 이민 와서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은 끝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나라의 사정은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훨씬 더 잘 안다. 이민을 오는 순간 그동안 쌓아 올렸던 경험이나 지식은 대부분 쓸모없어진다.  문화의 차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밖에서 대화도 제대로 못하고 물정도 모르는 데다가 그 사실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 부모를 당신은 얼마나 존경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동네에 비슷한 시기에 이민 온 사람들 중에 아버지와 연배가 같은 분이 계셨다. 학벌도 좋고 인품도 괜찮으신 분이었는데 이민생활의 스트레스로 부인이 조현병에 걸리게 되었다. 피해망상이 심해졌고 환청이 항상 들려서 베개 밑에 칼을 숨겨놓기도 했다.  한시 빨리 치료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아저씨는 그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겼다. 나중에 증세가 심해지자 아저씨는 어떤 한인 정신과 의사에게 진료 없이 뒷돈을 주고 몰래 약을 받아와서 밥에 타서 먹였지만 곧 들켰고 그 후로 아줌마의 망상은 더욱 심해졌다. 아저씨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최선을 다 한다고 생각했고 나이를 먹어 아내를 혼자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자녀들도 놓아주지 않았다.  부모님 말에 순종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아들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랐고 그들은 결혼도 못하고 몇십 년을 흘려보냈다. 지금도 누군가가 안부를 물어본다면 ‘괜찮습니다, 다 문제없습니다'라고 대답하신다.  구시대의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드러내고 도움을 구하기보다는 안으로 썩어 곪아터지는 편을 택하고 운명을 탓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지금 세대가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지혜롭다. 게다가 나이 먹은 사람들은 훈계와 경청 이외의 대화방식에는 매우 서투르다.  한국에 가서 노인들끼리 대화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재미있으면서도 섬찟하다. 양쪽 다 상대방의 말에는 별로 반응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응하더라도 대개는 말의 내용보다 태도나 몸짓처럼 언어 외적인 부분에 더 민감하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흘려듣고 자기 말할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는 모습은 예전에 노래방에 갔을 때를 생각나게 한다. 아무도 지금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게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모두들 큰 바인더를 뒤적거리면서 다음에는 자기가 뭘 불러야 될지 고민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음에도 다들 흡족한 얼굴을 하고 헤어졌다.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 방청객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애타게 찾지만 막상 자기들은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


9월이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럴수록 시간은 빨리 갔다. 개학날 우리는 학교 카운슬러를 만났다. 카운슬러 아줌마는 나에게 영어도 서툴고 하니 한 학년 낮춰서 들어가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사실 이민 와서 한 학년 낮춰 봐야 겨우 6개월 늦어지는 것이라서 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했다. 하지만 나보다 한 살 어린 아이들과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같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싫어서 영어는 내가 따라잡을 테니 내 나이에 맞는 학년에서 시작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카운슬러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중에 힘들면 그때 생각을 바꿔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영어 이름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한국 아이들은 열이면 아홉은 영어 이름을 썼고 많은 경우에 그것들은 학교에 처음 들어갈 때 카운슬러가 즉석으로 지어준 것이었다. "어 너 이름이 재상이니? 그럼 넌 이제부터 제이슨이다. 넌 미영이? 그럼 미셀이지" 이런 식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급조된 영어 이름을 대학 졸업하고 사회에 들어갈 때까지 썼다. 그래서 이곳에서 관공서 같은 곳에서 서류를 작성할 때에는 법적 이름 (여권에 명시된 한국 이름)과 평소에 쓰는 이름 두 개를 다 명시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내 이름과 비슷한 영어 이름들 중에 맘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나는 영어 이름이 없다. 설사 맘에 드는 이름이 있었어도 아버지는 그런 걸 허락할 분이 아니었다. 부모님 주신 이름 버리고 무슨 양놈 이름을 쓰냐 하면서 아버지는 영어 이름을 가진 한국 사람들을 비웃었다. 어차피 우리도 나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살러 왔잖아요 하면 얌마 그거랑 같아?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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