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밴쿠버에는 아버지가 아는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는데, 그중 아버지와 몇 년간 중동 건설현장에서 같이 일한 전 씨 아저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일년 반이나 먼저 온 아저씨네 가족은 마치 대선배처럼 느껴졌고 이민생활의 팁이라고 우리에게 해주는 말들은 다 그럴싸하게 들렸다.
아저씨는 온 가족이 이제 캐나다에 웬만큼 적응했고, 지금 장사하는 곳에서도 단골들과 여유롭게 영어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캐나다 문화에 동화되어가고 있다고 우리에게 자랑을 했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어떻게 바꾸냐며 한국 이름을 그대로 고수했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찰스라는 영어 이름도 갖고 있었다. 자기 이름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과하게 혀를 굴리면서 "촤알스-"라고 했다.
아저씨네 집 마당에는 여러 가지 잡목들과 수풀들이 우거져 있었는데, 아저씨는 그게 요새 유행하는 재패니스 가든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냥 잡초더미들 같았지만 예의상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집은 작은 단층집에 화장실도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잠금장치도 없었다. '가족끼리 뭐 하러 화장실 문을 잠그나'라는 아저씨의 말은 뭔가 일리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기묘했다.
아저씨는 내 나이 또래의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는데 아들은 아저씨를 닮아 자랑이 심했고 딸은 아줌마를 닮아 약삭빨랐다. 아들은 나와의 첫 만남에서 자기가 얼마나 백인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있는지, 백인 여자친구와 뽀뽀할 때 기분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나에게 한참 떠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의 말의 절반은 다 지어낸 얘기였고, 그는 아이들 사이에서 뻥쟁이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애나 어른이나 처음 보는 놈이 지 자랑을 계속 해대면 십중팔구는 사기꾼이다. 그런 걸 알 턱이 없는 나는 그걸 듣고 와 쟤는 백인여자애랑 뽀뽀도 해보고 성공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딸은 나보다 두 살 어렸다. 오빠와는 다르게 똑똑해서 약대를 들어갔고 약사가 된 후 공부를 다시 해서 변호사 자격증까지 땄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를 막 다니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토론토의 큰 제약회사에 3개월짜리 인턴으로 취직해서 오게 되었는데, 찰스 아저씨는 자기 딸이 공부만 해서 연애도 한번 못해본 숙맥이니 무슨 일이 생기면 잘 부탁한다고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어렸을 때 보고 오랜만이라 처음에는 좀 어색했지만 몇 번 만나고 나자 조금 친해지게 되었고, 그녀가 말하길 사실 자기 부모님한테는 비밀인데 연애는 지난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계속했고 곧 토론토에 자신의 남자친구가 와서 같이 한 달 정도 살다 갈 계획이라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사람들은 웬일인지 나에게 그런 비밀을 잘 털어놓았다. 아마 친구가 없어 보여서 이야기가 새나갈 염려가 없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남자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선공장에서 일하는 일본사람이었는데 래퍼가 되겠다고 말끝마다 같잖은 라임을 넣는 친구였다. 그런데 그 집 딸은 그게 무척 매력적으로 보이는 듯했다. 모범생 인생을 살던 여자들은 대부분 남자의 지성이나 교양은 크게 상관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걸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 그리고 대학 다니는 딸이 남자친구가 없다고 하는 말을 그대로 믿는 아버지만큼 순진한 건 없다. 하긴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아저씨는 자기 딸이 집안 좋고 돈도 많이 버는 한국 남자에게 시집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거기다 대고 당신 딸내미는 지금 일본 래퍼와 매일 자취방에서 뒹굴고 있어요라고 말해주었음 어땠을까 가끔 궁금하기는 하다.
아버지는 사람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자신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찰스 아저씨는 오래 같이 일해본 경험에 따르면 아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항상 이야기하셨다. 그래서 아저씨가 동업을 제의하자 주저하지 않고 얼른 수락했고, 몇 년 동안 잘 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모든 동업이 그렇듯 좋지 않게 끝났다. 여차하면 투자한 원금마저 아저씨에게 떼어먹힐 뻔했지만 생돈이 없어지는 걸 가만둘 어머니가 아니었기 때문에 쭈뼛거리는 아버지 대신에 어머니가 그 집 사람들과 대판 싸우고 난 후 원금을 회수했고 인연을 끊었다.
이 씨 아저씨라는 사람은 아버지와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었는데, 당시 포항제철 주재원으로 밴쿠버에 가족과 와 있었다. 주재원이라 자금 사정이 넉넉했고 그래서 밴쿠버에서도 부촌인 웨스트 밴쿠버의 고급 저택에 세를 살고 있었다. 아저씨는 딸 하나와 아들 둘이 있었는데 셋 다 공부를 잘한다며 자랑에 열을 올렸고, 아버지도 이에 질세라 나를 가리키면서 저자식도 공부를 좀 하긴 하는데... 하면서 맞받아쳤다. 당사자들은 느끼지 못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유치한 게 부모들끼리 모여서 서로 자식 자랑하는 게 아닐까 싶다. 유유상종이라고 자랑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어울려 논다.
하지만 그런 자랑의 이면에는 숨기고 싶은 것이 있고, 그런 상대방의 약점은 건드리지 않는 게 자식자랑 마니아들의 암묵적인 룰이다. 이 씨 아저씨의 막내아들은 나와 동갑이었는데, 왜소증을 앓고 있어서 키가 일 미터가 겨우 넘는 정도였고, 아저씨는 술이 많이 들어가면 자기 막내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소련에서 개발된 뼈를 잡아 늘이는 수술이 있다는데 그걸 해 보려 하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걱정을 했다.
반면에 아버지는 형에 대해서는 술이 얼마가 들어가건 별로 입을 열지 않았다.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는데...' 하면서 넌지시 장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고, 주변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이민을 온 후에도 의사를 찾아간다던지 기관을 알아본다던지 하는 노력은 학교측에서 형의 상태를 눈치채기 전까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전략은 그냥 무조건 숨기면서 오늘만 어떻게 넘기는 것이었고 이민 와서 우리가 새 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학교에다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날 보고 형이 티 안 나게 잘 데리고 다니라고만 신신당부할 뿐이었다. 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울 능력도 되지 않는 형을 학교에 왜 보내는지, 그러고 나서 나중에는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 아버지는 아무런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가족의 치부란 영원히 입을 다물어야만 하는 것이었고, 나도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록 바보가 되는 건 나 자신이었다. 이곳 사회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어두운 가족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건 내 잘못이 아니니까.
아버지는 남의 집에 가면 아이들끼리 놀아라 하고 형과 나를 처음 보는 그 집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몰아넣었다. "애들은 같이 놔두면 금방 친해진다"라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지만 형은 그때 열일곱이었고 나는 열다섯 살이었다. 매번 아이들은 이상한 행동을 하는 형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나는 진땀을 흘리면서 아무 말이나 하며 상황을 얼버무렸다. 나도 아버지처럼 솔직히 말을 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분위기는 항상 이상하게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에 아버지는 어른들과 마루에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계셨다. 남에게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임에서도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기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매우 넓고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이야기의 주제는 만주의 독립군부터 현재 국제 정세까지 광범위했고 이 때문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화술에 혹하곤 했다. 좀 어리숙한 사람들은 아버지를 초야에 묻혀 때를 기다리는 제갈공명에 견주곤 했다. 아마 아버지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 하는데, 아버지는 "능력은 있지만 때를 잘못 타고났다"를 선택했던 것이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부모님은 나에게 애들과 재미있게 놀았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항상 그저 그랬다고 짧게 답했다. 부모님은 그걸 잘 놀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하려던 말은 이런 곳에 나를 끌고 와서 창피 좀 주지 말아라였지만 누군가의 초대에 온 가족이 가지 않으면 가장의 체통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어차피 소용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