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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Sep 23. 2023

입국

1990년

우리는 어머니의 생신에 한국을 떠났다. 밴쿠버와 서울과는 시차가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떠난 시각과 비슷한 시간에 밴쿠버에 도착했다.  그래서 그해 생신은 다른 때보다 두 배 이상 길었지만 우리는 케이크도 먹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불평하지 않으셨다.  겁이 많았던 아버지는 혹시 이민 수속이 잘못돼서 공항에서 쫓겨날까 봐 이민국 직원 앞에서 매우 긴장했었다.  


이민 수속은 무슨 이민 공사라는 브로커를 통해서 밟았는데, 업체에서는 우리가 캐나다에 도착하면 공항으로 픽업을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임시로 거처할 곳도 제공한다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수속을 다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당장 그날 어디서 자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받을 돈 다 받았는데 힘들게 공항까지 나올 이유는 없었다. 이민은 한번 가버리면 그만이니 마음 상한 고객의 재방문 여부를 걱정할 이유도 없다. 돈 다 처먹고 나면 입 씻어도 그만인 것이 그 당시 이민업체들의 마인드였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그렇게 공항에서 바람맞은 이민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 경험으로는 한국 사람들은 사기를 쳐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면 대부분 사기를 친다. 도덕적인 결정을 내릴 때 서양은 기독교적 문화의 영향으로 자신의 양심에 따르는 반면, 동양권 문화에서는 남의 평판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타인의 부도덕한 행동을 보면 주제넘게 꾸짖기 좋아하는 게 한국 사람이다.  


이번 기회에 밴쿠버 호텔에 묵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은근 기대했지만 한 푼이 아쉬운 부모님은 길에서 잘 지언정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침 같은 업체를 통해서 이민온 50대 부부가 자기는 거처를 이미 마련했는데 방이 두 개인 곳이니 며칠 동안 머물라고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김사장이라는 아저씨였는데 우리 집보다는 확실히 부자였고, 20대인 딸과 외손녀도 관광차 같이 데리고 왔었다.  그 집 사람들은 영어를 그야말로 한마디도 못했기 때문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아버지 옆에 공항에서부터 착 붙어 있었고, 사람 좋은 아버지는 섭섭지 않게 대해 주었는데 그 덕인지는 모르지만 하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새로운 곳에 가면 겁부터 집어먹는 아버지는 나무 마룻바닥에 흠집이 나면 양놈들이 지랄한다며 가방을 들어서 옮기라고 우리에게 신신당부했다. 집에 김치 냄새가 배면 큰일난다고 걱정하는 아버지 등쌀에 밥을 먹고나면 얼른 치워야 했다.  방은 우리 네 명이 자기에는 충분했지만 아무래도 피난민 분위기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시차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고 천장을 바라보면서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시차적응을 하려고 우리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동네 주위를 산책하곤 했다. 49번가와 Main 근처였는데, 동네는 한산했고 숙소 바로 옆에 IGA라고 큰 슈퍼마켓이 있었다.  어머니는 당장 먹을 식료품을 산다고 거기에 들어갔다가 웬 바나나를 한 박스 사가지고 오셨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바나나가 한 개에 4-5천 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런 바나나를 거기서는 큰 박스에 한국 돈으로 2만 원에 팔았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동양 아줌마답게 쓸모없어도 일단 싸면 사서 쟁이는 습성이 있었다.  우리는 바나나를 열심히 먹었지만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더운 날씨에 바나나는 급속도로 변질되어 갔다. 어머니는 계속 우리에게 먹는 걸 어떻게 버리냐며 바나나를 들이댔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대부분은 결국 먹지 못할 정도로 썩었고 나는 그 후 몇 년 동안 바나나를 먹지 않았다.


아버지는 렌트할 아파트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밴쿠버에서 대중교통으로 집을 알아보러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차를 사는 것이 우선이었다.  입국한 지 삼사일 만에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소개해준 한인 딜러 아저씨가 집으로 왔다.  아버지는 고장이 나지 않는다는 일본차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딜러 아저씨는 왜 미국차가 세계 최고인지, 튼튼한 미국차가 얼마나 듬직한지에 대해 설파했고 그다음 날 그저 구경만 하러 간다는 아버지는 저녁 무렵 뜬금없이 빨간 미니밴 하나를 싱글벙글하면서 몰고 오셨다. Pontiac Trans Sport라는 모델이었다. 차가 급해서 할수없이 집어왔다고 하셨지만 디자인 하나는 매우 잘 빠진 차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매우 만족해 보였다.  아버지가 물건이나 사람을 고를 때 제일 중요시 하는 건 겉모습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한국서 정비공 교육까지 받고 오셨지만 그 차가 무게에 비해 아주 빈약한 엔진을 갖고 있으며 GM의 첫 모델이어서 온갖 잔고장이 날 거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셨다. 


나중에 공조버튼이나 사이드브레이크처럼 자잘한 곳에서 고장이 나자 정비소에 갈 돈이 없는 우리는 집에서 고쳐보겠다고 철사니 절연테이프니를 사다가 고치려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언덕이 많은 밴쿠버에서 오르막길에 다다르면 액셀을 끝까지 밟아도 속력이 점점 줄어드는 그런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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