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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Aug 21. 2023

이민 가던 날 (3)

1990년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지금의 서일 중학교 뒤에 있었는데, 2000년대 초반 재건축 붐이 불 때 헐렸고 지금은 롯데캐슬 단지가 들어와 있다.  1990년 당시 우리는 35평짜리를 팔아서 2억 조금 안되게 받았는데, 부모님은 샀던 가격보다 두 배 넘게 받았다고 흡족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20여 년이 지난 후 재건축된 아파트의 가격은 20억이 넘어 있었다.  그냥 집만 움켜쥐고 목숨만 부지하면서 살았어도 지금쯤 우리는 20억 부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새 주인에게 집을 넘겨야 할 날이 되었지만 한국을 떠날 때까지는 아직 일주일 정도가 남아있었다.  자동차도 장안평인가 가서 팔았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이민가방을 택시에 욱여넣고 여의도 고모네 집으로 갔다.  우리 집 자동차는 86년에 산 스텔라였다.  아버지가 현대에 다니실 때 샀기 때문에 직원가로 싸게 구매했지만 옵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깡통이었다.  에어컨은 고사하고 유리창도 손으로 돌려서 내려야 했지만 나는 차를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가 차를 인수한 그날 밤 나는 뒷좌석에서 이불을 덮고 잤다.  


아버지는 쓸데없는 옵션 같은 걸 달면 사치라고 말하셨다. "6.25가 엊그제였는데 쓸데없는 것에 낭비를 하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려면 훨씬 싼 기아 프라이드나 현대 엑셀은 왜 안 사나요 하는 질문에는 "야 인마 차가 커야지 그딴 작은 차는 폼이 안나"라고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셨다. 실은 같은 돈이면 편의사항을 사서 실속 있게 사는 것보다 겉으로 남에게 보이는 것에 투자하는 것을 선호하셨기 때문이었다.


“에어컨이 뭐가 필요하냐, 창문 열면 되는데.” 아버지는 비가 오는 날이면 흐려진 앞유리를 걸레로 닦으면서 현대차는 비가 오면 앞유리에 습기가 끼는 게 고질병이라고 불평하셨다.  에어컨이 있는 차는 부채꼴에 화살표그림의 공조장치 버튼을 누르면 습기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민 오고 나서도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비가 오면 항상 걸레로 앞 유리창을 닦았다.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자주 시외로 드라이브를 나가셨는데, 어머니는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데다가 꺾어져야 할 사거리가 나오면 항상 바로 직전에 “여기서 좌회전해!” 하고 외쳤기 때문에 아버지와 자주 싸웠고 그 후로는 내가 앞에 타서 지도를 보았다.  잘 나가지도 않는 차였지만 경찰한테 두 번이나 잡혔다. 아버지는 눈치가 없어서 마주 오는 차가 쌍라이트를 깜박거리며 ”여기 경찰 있어 조심해 “ 하고 경고를 해도 ”쟤는 왜 깜박거려 “ 하면서 밟아댔기 때문이었다.  경찰에 걸리면 운전면허증 뒤에 2만 원을 접어 넣고 면허지갑째 넘긴다.  2-3분 후 경찰이 ”아 담에는 조심하세요 “ 하고 웃는 얼굴로 지갑을 되돌려 주면 2만 원은 사라져 있었다.  아버지는 공권력이 썩어 있어서 큰일이라면서 경찰 욕을 했다.


여의도 고모네 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시던 집이었다. 고모들은 시집을 안 가서 그런지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거의 예수님만큼 추앙했고 일 년에 두세 번씩 충남의 선산까지 가서 성묘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일이면 외아들인 우리 아버지의 집에 와서 추도식을 했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는 증조할아버지 기일에도 추도예배를 드려야 한다며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증조할아버지의 초상화를 들고 나타났다.  나는 추도예배가 도대체 무엇에 쓸모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천국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보고 싶다고 훌쩍거리는 게 얼마나 병신스러운 짓인가.  그리고 우리도 조만간 죽어서 만나게 될 텐데 영영 못볼 것처럼 우는 것이 이상했다.  듣기로 증조할아버지는 집안 재산을 주색잡기에 날린 개망나니였고 돈이 떨어지자 서울에서 치과를 하시던 할아버지에게 빌붙으려고 모월 모시에 서울역에 (기생이었던) 새어머니와 도착할 것이니 마중을 나오라는 전보를 날렸다.  할아버지는 그 길로 치과를 처분하고 만주로 도망쳤다고 한다.  나도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자 아버지는 내게 전화를 걸어서 형과 엄마를 보살피기에는 내가 힘에 부치니 우리 다 네가 사는 토론토로 가겠다고 통보했다.  몇 년 전만 해도 큰 물에서 네 혼자 꿈을 펼쳐라 하시던 건 말끔히 잊어버리신 듯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로 밴에 가재도구를 싣고 토론토에 왔다.  십 년을 넘게 캐나다에서 살았지만 여기 문화는 전혀 모르시던 아버지는 여기저기서 일을 벌였고 그때마다 날 불러서 수습을 시켰다. 아버지는 종종 내가 할아버지를 반만 닮았더라도 크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나도 가족을 피해서 다른 도시로 도망갔더라면 더 잘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모들이 고조할아버지 초상화까지 들고 나타나서 우리를 있게 해 주신 은인이시니 기리는 게 마땅하다면서 추도예배 날짜를 정해줄 무렵 우리는 이민을 왔다.  


고모들은 한민족의 얼을 지켜야 한다던지, 자랑스러운 밀양 국당공파의 박 씨 가문 후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던지 그런 말을 나에게 틈틈이 했다. 아버지를 포함한 친가 친척들은 그런 별 시답잖은 간판을 대단하게 내세우는 습관이 있었다.  고모들은 또 나에게 아버지 등에는 안중근 의사처럼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있다며 큰 인물이 될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목욕탕에서 본 아버지의 등에는 그냥 점이 여기저기 많았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안중근 의사처럼 누구를 쏘지도 못했고 혈서를 쓰지도 않았다.  그냥 만수산 드렁칡처럼 이리저리 대충 살다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외국으로 도망치는 소시민에 불과했다.


우리가 이민 가던 날 외가 식구들이 총 출동해서 우리를 김포공항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때는 인천공항이 지어지기 전이었다.  우리는 출국수속을 하기 전 게이트 근처에 둥그렇게 자리를 잡고 환송예배를 드렸다.  다 같이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기도를 했다.  요새는 그런 걸 보지 못했지만 그때는 이민 가는 사람들을 배웅하러 교회 목사님까지 나와서 공항 로비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 흔했다. 나는 전혀 모르는 나라로 살러 가는 게 꺼림칙했지만 영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시는 데다가 사전 답사까지 다녀오시고 학원에서 기술까지 배우신 아버지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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