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을 받고 얼떨떨해하고 있는 나에게 짝은 아뭇소리 말고 그냥 자기네들을 따라오기만 하라고 말했다. 다들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이었지만 학교 밖에서 따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뭔가 불안했다. 이렇게 남녀가 여럿이서 길거리에 같이 다니면 선도부에 잡혀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이민 간다고 자퇴서까지 냈는데도 선도부를 겁내는 건 내가 간이 작아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곳은 오락실밖에 없었지만 그 무리에서 오락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그럴 일은 없었다.
80년대의 오락실은 탈선과 범죄의 온상으로 여겨졌었고, 사실 그때는 선도부 선생들이 비정기적으로 동네 오락실을 급습해서 자기 학교 학생들을 잡아가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장사 수완이 좋은 오락실 주인이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미리 학교에다가 기름칠을 해주는 게 현명했다. 한 번은 근처 사랑의 교회 중등부 아이들이 전도사의 인솔 아래 오락실 입구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적힌 띠를 매고 오락실 입구에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세요,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주인이 나와서 미친놈들은 꺼지라고 했지만 신앙심이 충만한 아이들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죄악 벗은 형제들은 마귀와 싸우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여학생들이 그런 걸 열심히 했다.
나는 용돈의 대부분을 오락실에서 탕진했었다. 지금의 아이들은 모른다. 그때는 오락실에서만 맡을 수 있는 브라운관 모니터와 회로기판에서 나는 전기의 냄새가 있었다. 나는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그 냄새를 맡기만 하면 희망이 솟았다. 나는 여차하면 도망가기 용이하도록 입구가 두 군데 거나 미로처럼 기계들이 배치되어 있는 강남역 뒤의 "자유시간" 혹은 삼익 상가 안의 오락실을 주로 갔다. "이번에는 삼백 원만 쓰고 나와야지" 하고 매번 다짐을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오천 원이나 만원 짜리를 주인 아주머니에게 바꿔달라고 하고 있었다. 중독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술담배나 도박을 하지 않는다. "이것만 하고 그만둬야지"가 얼마나 가소로운 생각인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인간의 의지란 참으로 하찮은 것이다.
우리는 서일중학교를 나와서 삼익과 삼호 아파트를 지나 지금 KCC 빌딩이 있는 주택은행 앞 사평대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졌다. 지금 신논현역 교보문고가 있는 자리에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이 있었다. 그보다 더 옛날에는 자동차 운전학원이 있었고 근방이 다 노는 땅이었다. 우리가 서초동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 그곳은 평당 만원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의 신논현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신사역 방향으로 갔다. 그곳은 영동시장이라고 불리는 동네였고 큰길에서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점집들이 많았다. 전통시장 곳곳에 처녀보살이나 애기동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큰길은 개발이 되어 있었고 현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 자리 근처에 다모아 영화관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한국 최초의 멀티플렉스 극장이어서 스크린은 작지만 3개의 상영관을 가진 곳이었다. 학교에서 더 가까운 영화관으로는 강남대로와 영동플라자 사이에 피렌체라는 영화관도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만화영화도 곧잘 상영했지만 내가 중학생이 될 즈음에는 주로 실비아 크리스텔이 나오는 에로영화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나마 영화다운 영화를 보려면 다모아가 제일 가까웠다.
영화관 앞에서 우리는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백 투더 퓨쳐 3"를 볼 계획이었는데, 나는 그 영화를 한 달 전에 이미 봤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별로 재미가 없었기 때문에 난 다시 볼 생각이 없었다. 논의 끝에 우리는 시간에 맞춰 뜬금없게도 "총알탄 사나이"를 보았다. 여자 가슴 모양의 원자력발전소 건물이 도입부부터 등장하고 정사장면에서는 거대한 콘돔 속에 온몸을 구겨 넣고 서로 뒹구는 그런 영화였다. 분명히 청소년 관람불가여야 할 영화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6명의 중2 학생들이 표를 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는 그런 식의 성인 코미디를 좋아했기 때문에 영화가 끝난 후 흡족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섰지만 밖에서 다시 만난 여자아이들의 표정은 매우 어두워져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해가 아파트들 사이로 지기 시작했다. 이제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앞으로 다시 보지 못하는 친구들이었지만 나는 체감이 되지 않았다. 내일도 나는 학교를 가야 할 것 같았다. 작별의 순간에도 낯간지러운 게 싫어서 고마웠다는 말도 없이 왠지 어정쩡하고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헤어졌다. 나는 그때까지 살면서 친구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막상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작년에 그중 하나였던 K와 다시 연락이 닿았고 올해 그녀를 20여 년 만에 다시 만났다. K는 아이를 둘 가진 대기업의 부장님이 되어 있었지만 그때와 다름없이 상냥했다. 2000년도에 나는 한국에서 K를 만났다. 지금의 CGV 강남 뒤편에 큰 세인트버나드 개가 있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20대의 나는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고맙다는 말을 하는 대신 내가 이민가서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고 지금 얼마나 잘 나가고 있는지 설명하는 데에만 급했던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K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지금 나이를 먹고 보니 사실 나만큼의 우여곡절을 겪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으며 내가 지금 이만큼이나마 살고 있는 것은 거의 운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할 기회는 그렇게 자주 오지 않는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때 다들 너무 고마웠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져서 미안했다고 나는 몇십 년 동안 묵혀 뒀던 말을 꺼냈다. "그랬었나?" K는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곧이어 자기 아들이 공부를 못해서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