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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Jul 27. 2023

이민 가던 날 (1)

1990년

웬만해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이민 날짜가 2주 안으로 다가왔다.  1학기가 끝나던 날 선생님은 나를 교단으로 불러서 내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됐으니 거기 가서도 잘 살라고 다 같이 빌어 주자고 말했다. 아이들은 다들 잘 가라고 한 목소리로 아쉬워해 주었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서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이제 이 교실은 두 번 다시 올 일이 없을 것이다.  이제는 매일 아침 등교하면서 배지와 명찰을 챙길 필요도 없다.  


그런데 짝이 나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모닝글로리의 양철 필통이었다. 보라색 바탕에 뜻모를 불어가 써 있었다. 당시에는 문구류에 말같지도 않은 영어나 불어를 써서 있어 보이게 하는 게 유행이었는데, 그래도 내 눈에는 멋있어 보였다.  나는 사실 그전까지 필통 대신에 고무줄로 필기도구를 묶어서 가지고 다녔었다. 이렇게 다니면 더 가볍고 편한데 뭐 하러 쇳덩어리 속에 넣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 번은 끼고 다니던 안경의 나사가 빠진 적이 있었다.  나는 안경점에 가는 대신 클립으로 다리를 고정했다. 클립은 생각보다 잘 버텨서 만족스러웠지만 짝은 한심한 눈으로 궁상 좀 그만 떨라고 잔소리를 하곤 했다. 짝은 누나가 있는 남자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섬세한 성격에 세상에 아주 불만이 많은 친구였는데 나와는 죽이 잘 맞았었다. 그는 지금 서울에서 상당히 유명한 의사가 되어 있다.  


 뭐든지 아끼고 안 쓰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님 밑에서 이런 나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민오기 전까지 다이얼을 돌리는 전화기를 썼다. 그때는 웬만한 집에 맥슨 무선전화기 하나는 있을 시절이었다. 전자레인지도 이민 오고 나서 살게 된 주택에 딸려 온 걸 처음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네 나이 때 영국에 살다 온 아이가 어디 있느냐며 틈만 나면 우리 집안이 얼마나 유복한지 강조했다.  나는 영국에 살다 오기는 했지만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필기도구를 고무줄에 묶어서 다니는 아이였다.


우리 집은 아낀다고 용을 썼지만 이상한 곳에서 돈이 샜다. 어머니는 가격에 따라 노동의 질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5만 원어치 공임을 4만 원으로 깎고 만원 아꼈다고 뿌듯하게 생각해도 판매자는 만 원어치 덜 해주고 자기 몫을 챙겨가기 마련이다. 나는 당시 종로의 바이올린 학원에 매달 3만 5천 원씩을 내면서 다녔었는데, 그 당시 집에서 가까웠던 진로도매센터의 어린이 바이올린 교실에도 우리 학원 원장이 나와서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어머니는 학원을 끊고 어린이 교실을 수강시켰다. 진로도매센터는 1만 5천 원밖에 받지 않는데다가 무료 셔틀버스로 다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선생인데 반값이면 여기 보내지! 선생은 도매센터에서는 나를 조수로만 썼고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는 집에 가서 선생이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같은 선생이 가르치는데 왜?  나는 얼마 후 종로의 학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고 거기서는 진도가 빨리빨리 나갔다.  학원은 종로 3가 낙원상가 바로 앞에 있었는데, 서초동에서 45번 좌석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버스 정류장은 2가에 있었다. 그 당시 겨울은 지금보다 훨씬 추웠고 나의 겨울점퍼는 다 낡아서 크게 쓸모가 없었다.  한 번은 너무 추워서 머리를 쓴다고 길거리에서 파는 풀빵 두 개를 사서 품에 넣고 왔다.  아버지한테 자랑스럽게 그 얘기를 하자 아버지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하시더니 다음날 강남역에 가서 새 프로스펙스 오리털 점퍼를 사 주셨다. 하지만 오래 입어야 하니까 어머니는 제일 큰 사이즈를 골랐고 국민학교 6학년 때 산 점퍼는 내가 대학을 가서야 몸에 맞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애가 저렇게 춥다는데 옷도 안 사주고 뭐 했냐고 타박하셨지만 어머니는 원래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추워서 쓰러지기 전에는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부정교합으로 치아교정을 받으러 서초삼호상가 3층에 있는 치과에 몇 년 다니기도 했었다. 입구에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글씨가 쓰여 있는 큰 거울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다달이 갈 때마다 2만원씩 돈을 냈다. 원래 소개받은 데가 있었는데 어머니 말로는 여기가 더 쌌다고 한다.  어느 시점이 되자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치료라고 하는 것도 하나도 없었지만 의사는 계속 돈을 챙겼다.  치과에 가면 의자에 한 3분 누워있다가 의사가 한번 쓱 보면 일어나는 게 끝이었다.  나는 충치가 4개나 생겼지만 의사는 매번 내 입안을 쳐다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학교 신체검사 때 보건 선생님이 나의 이를 보고 한숨을 쉬면서 "너 어디서 교정하니" 하고 묻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던 나는 '삼호상가 최낙준 치과 다니는데요' 하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치과에 가서 충치 얘기를 하자 치과의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충치 치료를 해 주었다. 물론 치료비는 다 받고. 이번에 한국에 가니 삼호상가에 아직도 그 치과의 간판이 걸려 있었다.  최낙준 선생은 이제 70이 넘었을 것이다.


나는 그냥 이렇게 아끼면서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랬기 때문에 누가 나한테 선물을 준다는 건 별로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생일파티란 것도 하지 않았었고, 그렇게 인기 있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짝이 선물을 건네자 곧이어 내 뒤에 앉았던 키 크고 어른스럽던 J라는 여자애는 누르면 소리가 나는 고릴라 인형을, 6학년때부터 알고 지내던 (일전에 이야기한 압구정에서 전학 온) H는 향수병을,  H의 짝이었던 K는 벽걸이 장식품을 나에게 카드와 같이 안겨 주었다. K는 카드에 나는 참 괜찮은 남자이며 어디 가서나 관심을 살 거라고 썼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니 다들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 주었던 친구들이었고, 그걸 나는 떠나는 날에야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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