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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인생 Nov 15. 2023

이민자들은 친구가 필요하다

1990년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삼사십 대의 이민자들은 고국을 등지고 전혀 모르는 나라에 살러 왔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글로벌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끼니때마다 밥과 김치가 있어야 했고 집에서는 자식들에게 백인들과 결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얼러댔다. 나는 그런 아저씨들을 보면서 김치 한 끼 못 먹어도 고추장이 어디 있냐고 난리 치는 주제에 뭔 깡으로 이민을 왔을까 궁금했다.  자격지심 때문인지 사람들은 걸핏하면 여기 양놈들은 너무 순진하고 답답해서 이런 나라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신기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약삭빠르고 그악스러워야 하루하루 살 수 있던 환경에서 살다가 캐나다 같은 나라를 오게 되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한국 이민자들은 주말이면 주로 다른 한국인들과 모임을 가졌다. 정보의 교류가 지금처럼 빠르지 않던 그때는 정착한지 오래된 사람들이 이민온지 일년이 채 안된 사람들에게 "요새 한국은 어떤가요?" 하고 묻곤 했다. 술이 조금 들어가면 아저씨들은 항상 정치 이야기를 했고 아줌마들은 이번 주에는 어느 마트에서 고기 세일을 제일 많이 하느냐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 아저씨들은 투표권도 없으면서 이번에야말로 김대중이 대권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3김 중 다른 사람이 해 먹을 것인가 같은 시답잖은 주제를 가지고 열을 올렸다. "그 사람은 이거만 집중 공략하면 다음 대선은 따놓은 거래니까!" 하튼 방구석에서는 너도나도 다 김종필 이회창 뺨치는 정치 9단이었다. 


당시 내 느낌으로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지지하는지 웬만하면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았고, 자신이 지지하지 않더라도 대화 중에는 김영삼 씨 혹은 김대중 씨라고 불러 주었다. 혹이라도 상대방이 그 사람 편이라면 괜히 심기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우선 삼사십 대의 다수가 좌파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데다가 나이를 막론하고 정치색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만나면 온라인에서는 물론이고 오프라인에서도 면전에 대고 천박한 비아냥을 일삼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숭배하는 정치인들은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텐데도 대단한 충성심이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이사를 마치고 나는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다. 옛날에는 항공우편엽서라는 것이 있었다. 우표가 종이에 이미 인쇄되어 있어서 거기에 편지를 쓰고 접어서 풀로 붙이고 그대로 우체통에 넣기만 하면 되는 엽서였다. 우체국 점원과 영어를 해야 하는 게 무서워서 처음에는 그걸 사다놓고 썼지만 점점 나중에 쓸 이야기가 많아지자 연습장 한 묶음을 사서 거기다 편지를 쓰고 매번 약국에 가서 우표를 사서 부쳤다. 그때는 국제우편이 79센트밖에 하지 않을 시절이었다. 


원래는 친한 친구 대여섯 명에게만 편지를 썼는데, 외국에서 온 편지를 받아보는 게 부러웠던 다른 아이들은 답장을 써 달라고 먼저 나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은 답장이 한두 번 오가면 그걸로 만족하고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내가 떠난 이후의 근황을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고 소풍 가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기도 했다.  다른 아이의 험담들도 많았다.  나는 서로 친한 줄만 알았던 아이들끼리 서로에 대해 스스럼없이 험담을 하는 것이 처음에는 조금 놀라웠지만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끼리 하는 말을 많이 들어본 터라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려니 했다.


아버지도 장사를 시작하시기 전이라 무료했던지 내 편지를 뺏어서 읽기 시작하셨다. 여자한테서 편지가 오면 1불씩 내라는 농담도 하셨고 나는 그걸 아이들에게 그대로 말해주자 어떤 애들은 겉봉에 남자 이름을 써서 보내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모임에 가서 할 말이 없으면 “요새 애들은 편지에 이런 것도 쓰더라" 하면서 썰을 늘어놓았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당시에는 모두들 그러려니 했다.  분위기가 심상찮으면 자식의 책상서랍에 있는 일기장부터 뒤져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 당시에 자식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부모들은 정말 앞서가는 사람들이었다.


내 편지에 제일 처음 답장을 보내준 이는 내 짝이었다. 짝은 내가 가고 난 이후의 근황을 마치 기자처럼 상세하게 설명했다. 내가 떠나고 외국에서 살아서 겉멋이 잔뜩 든 아이가 전학을 왔고, 내가 없으니 교실이 재미없어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친구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유명한 사람들의 명언을 언급하며 편지를 끝맺었다. 그다음 날에는 K의 답장이 왔다. K는 다른 사람한테 편지를 써 본 적이 별로 없는 듯한 작문실력이었지만 그래도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얼마 전에 언급한 두서없는 S의 편지가 도착했다.


나는 보내준 답장들을 시간이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었다. 얼마나 자주 읽었는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내용들이 생각날 정도다. 그만큼 나는 새로 친구를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가득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 구석 한편에는 나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고 그때는 아이들이 아마 지금처럼 나를 보고 싶어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짝, K, S, 나 그렇게 넷이 만났었다. 아무도 그때 일을 나처럼 소상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다들 서로 반가워했고 근황을 나누었다. 우리는 더 이상 30년 전의 그 아이들이 아니었고  그때의 기억도 많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약간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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