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교포 한국 아이들은 공부를 대체로 열심히 한다.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렇다. 당시의 한국인들에게는 성실함이란 최선의 덕목이었다. 공부를 좋아해서 잘하는 게 아니다. 공책에 빽빽하게 쓰고 달달 외우고 선생한테 애교를 부려서 시험 힌트를 알아내고 작년에 출제했던 시험지를 어디서 구해와서 문제유형을 파악하고 하튼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그래서 점수를 잘 받는 것이다. 중국과 한국 사람들이 주로 이런 타입이 많았다. 뭐든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것이다. 절대로 쉬지 않는다. 남이 하는 건 내가 다 해봐야 하고 더 잘해야 한다.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특히 그랬다.
내가 뭘 공부하고 싶은지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지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그러려면 좋은 직장에 다녀야 하고 그러려면 학벌이다. 이것이 대부분 중산층 부모들의 성공 공식이었다. 한국인에게 공부란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자신의 등급을 정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때는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원하는 대학만 가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고 했고, 그래서 일단 대학에 들어가면 다들 열심히들 놀았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부모들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일단 좋은 대학에 입학만 하면 그걸로 끝나는 줄로 알고 있었다. 내가 2학년이 되자 내가 알던 한국 아이들은 여러 도시의 대학에 갔고, 그중 몇은 한인타운이 그나마 제일 큰 토론토에 자주 놀러 왔기 때문에 종종 만나기도 했다.
밴쿠버의 한국인들에게 캐나다의 명문대란 UBC, 맥길, 퀸스, 토론토, 그리고 웨스턴 정도였다. 그중에서 웨스턴은 사실 당시에는 다른 대학보다 들어가기 쉬웠지만 한국인들이 많이 갔고 그들은 웨스턴이야말로 최고다 하고 여기저기서 우겨댔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믿었다.
웨스턴의 Ivey 스쿨은 경영/비즈니스 전공이 세계적으로 유명했고 인문계에 들어가는 한인들의 한 80프로는 그곳이 목표였지만 막상 합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처음 2년 동안의 대학 성적으로 입학을 결정했던 것 같다. 떨어진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학 전공으로 졸업했다. 비슷한 경우로는 토론토대학이나 다른 명문대에서 의대나 치대를 가려고 생명과학부에 입학했다가 그냥 생물학 전공으로 졸업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 한인 신문을 보면 부동산 광고에 나오는 중개업자들 이력에 토론토 대학 생물학 전공들이 가끔 보이는데, 그럴 때마다 아 이 사람도 의대 못 들어가서 그냥 생물학으로 졸업장만 땄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난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 생물학으로 학사만 따고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애들이 몇이나 있나?
맥길은 불어권인 몬트리올에 있지만 영어로 강의를 해서 타주에서 많이들 갔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에게는 멋있는 동네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그냥 말도 안 통하는 시골이었고 거기 다니는 한인들도 대부분 불어는 한마디도 못 했다. 거긴 한인타운이라고 불릴 데가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야, 요새 김건모 새 앨범이 나왔다는데 구하게 되면 소포로 부쳐주라” 식의 부탁을 많이 받았었다.
몬트리올에 놀러 간 적도 몇 번 있었는데 기억나는 건 캐나다에서 제일 화끈하다는 스트립바와 월남국숫집이었다. 프랑스가 식민지 경영 하면서 그나마 잘한 거라곤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법을 전해준 것 밖에 없다. 스트립바는 입장료와 맥주값이 비쌌기 때문에 맥길 다니는 형이 큰 맘을 먹고 데려갔지만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스테이지에서 먼 곳에 자리 잡았고 난 눈도 나빴기 때문에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서 “저 여자 옷 벗은 거야?”를 계속 물어보았다.
스트립바에서 돌아오고 나서 형은 "이거 퀘벡에서만 볼 수 있는 거야" 하면서 실제로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는 영상들을 모아놓은 "Faces of Death" 란 다큐 비디오를 틀어주었다. 우리가 인기남 축에 들었다면 그 시간에 그렇게 핫하다는 몬트리올의 클럽에 갔겠지만 그냥 우리는 맥주 한 병 시키고 스트립바 구석에서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집에 와서 고어 비디오 보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퀸스 대학은 뭔가 좀 이상한 곳이었다. 그곳은 마치 해병대 같았다. 볼 거라고는 호수와 감옥밖에 없는 온타리오주의 Kingston이라는 소도시에 위치한 퀸스는 입결도 높고 평판도 좋았다. 실제로 고등학교 때 알던 공부 잘하는 현지인 학생들의 선택지이기도 했다. 작은 마을에서 공동체처럼 모여 살면서 공부하는 게 그들에게는 큰 매력이었다. 그래서 클럽 활동도 활발하고 학생들끼리의 유대감도 높은 편이다. 수업 끝나면 모래처럼 뿔뿔이 흩어지는 토론토대학과는 다르다.
그런데 퀸스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자기네 학교 자랑을 그렇게 해댔다. 알겠으니 다른 얘기 하자고 해도 우리 퀸스에서는 이렇게 하는데 너네 학교는 우리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는구나 하면서 끊임없이 우월감을 재확인했다. 어렸을 때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우월해하는 경우가 많다. 퀸스대의 과잠은 갈색 가죽에 노란 글씨로 매우 촌스러웠는데 난 그런 옷을 이백 달러나 줘야 된다는 것에 놀랐고 그 옷이 없는 학생이 없다는 점에 두 번 놀랐다.
내가 한 번은 “그래서 퀸스 졸업생 중에서 유명한 사람은 누가 있니?” 하고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빨간 머리 앤! 걔도 퀸스 나왔잖아!” 하고 으스댔다.
“너 빨간 머리 앤은 소설 주인공이라는 거 아니?”
“알지! 얼마나 훌륭한 학교면 소설에서도 나오겠어!”
한국인뿐만 아니라 다들 신입생 때는 많이들 논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정도가 아니라 마치 내일 죽는 사람들처럼 사력을 다해서 놀았다. 부모가 없는 곳에서 내 맘대로 살 수 있게 되니 해방감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워홀 다녀온 여자는 거르라는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토론토에서 수많은 유학생들과 워홀러를 본 경험으로는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인들은 통제만 받으며 살아서 그런지 갑자기 자유를 얻게 되면 어색해 한다. 부모와 살 때는 10시 전에 돌아와야 했지만 이제는 클럽서 밤을 새도 뭐라 그럴 사람이 없다. 그리고 자기 자식이 타지에서 돈 없이 고생할까 봐 돈은 또 팍팍 쥐어준다. 대학 성적이 개판으로 나와도 자기들 젊을 때 생각하면서 “그래! 캠퍼스에서 낭만도 즐겨야지!” 하면서 너그럽게 봐준다. 부모들까지 묵인을 해 주니 더 거칠 것이 없다. 난 똑똑하고 성실하고 부모한테 사랑받고 그리고 호주머니에는 돈도 많다. 대학은 인생을 즐기려고 온 것이지 고등학교때처럼 성적에 목매려고 온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입학 때는 수줍고 조용하던 애들이 한두 학기가 지나면 전혀 딴 사람이 되는 걸 많이 보았다. 허세 좋아하고 노는 것 좋아하고 별거 아닌 걸 가지고 뭔가 심오한 것인 양 이야기를 한다. 언젠가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점에 있어서 한국인은 흑인들과 많이 비슷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노래 부르고 춤추는 걸 좋아한다.
한국인의 경우에는 술을, 흑인의 경우에는 마약을 많이들 한다.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떠드는 것을 좋아하고 관심받는 걸 즐긴다.
가난해도 명품을 휘감고 다닌다.
단순해서 사기를 잘 당하고 선동에 잘 넘어간다
피해의식이 많아서 뭘 해도 인종차별이라고 그런다.
이 사람은 여기서 대학을 나오고 한국서 대기업에 취직을 한 속칭 검머외인데, 눈치 없이 한국 가서 술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가 어디 위대한 한민족을 껌둥이들과 비교하냐고 욕을 먹었다. 하긴 자존심이 세고 화를 잘 내는 것도 비슷하긴 하다.
지금 MZ 세대들 욕하는 우리 나이대 영포티들이 많은데, 누누이 말하지만 지금 영포티들도 20대 때는 MZ만큼이나 병신들이었다. 노인들은 머리가 썩었다는 말은 유시민만 하던 말이 아니다. 그 무렵의 그 세대들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했다. 조롱하는 그림과 욕설로 아무나 모독하던 세대다. 김구라의 시사대담도 다 그때 일이고 이문열을 수구꼴통이라고 비판하면서 다들 보는 앞에서 작가의 책을 불태우는 홍위병스런 짓도 즐겁게 했다. 조선일보를 밤의 대통령이라고 신나게 조롱하던 진중권도 그 시대 사람이다. 진중권은 지금 보니까 TV 조선의 한 시사프로의 진행자 노릇을 하고 있다. 욕설이 난무하는 무의미한 영화들에 열광하던 세대도 영포티들이다. 지금의 40-50대는 본격적으로 천박함을 매력으로 삼은 첫 세대이다. 한국에 여러번 갈 때마다 제일 예의가 바른 세대는 그나마 20대들이 아닌가 한다. 20대 진상들은 50대 진상에게는 명함도 못 내민다.
오래된 친구들과 20대 때 추억을 가끔씩 이야기할 때가 있는데, 그들이 “나는 적어도 그러지는 않았어” 식으로 나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누구 못지않게 부모 등골 파먹고 철딱서니 없이 막 살았던 사람일수록 요새 애들을 욕한다. 기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