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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bootsbookclub Jan 06. 2021

가을, 길 위에서/ 유장미

redbootsbookclub_magazine vol.1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고 하늘을 살핀다.


 구름이 제법 두껍게 드리운 흐린 날씨지만 다행히 비가 오지는 않을 것 같다. 오늘은 정우와 함께 야외 수업을 하기로 한 날이다. 가정방문수업이라 주로 집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늘 그게 아쉬웠다. 13살, 점점 청소년기에 접어드는 정우에게는 이제 인지나 감각과 관련된 활동들과 더불어 정우가 살아가는 실제적 환경에서 의미있게 이루어질 수 있는 기능적인 요소들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코로나 때문에 거의 외출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안그래도 단조로운 생활이 더 정체되어 있어 마음이 쓰였었다. 코로나 상황이 계속 불안정하게 흘러가고 있어서 조심스럽긴해도 안전한 거리두기가 가능한 환경이라면 집 밖에서 할 수 있는 활동들도 경험하게 해 주고 싶었다. 정우 어머니께 미리 비가 오지 않으면 정우 외출준비를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었다. 자, 해보는 거야. 나 역시 내심 기대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집을 나섰다.  

철컥

  현관문이 열리자 마스크를 꼼꼼히 쓰고 나를 기다리고 계시던 정우 어머니와 정우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오늘의 목적지를 근처 지하철역 앞에 있는 근린공원으로 잡았다. 정우네 집에서 15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새로운 장소라서 어머니께 동행을 부탁드리고 함께 길을 나섰다. 사실 야외수업을 생각하면서 나는 정우와 더불어 정우 어머니도 간간히 함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정우네 집을 오가면서 살펴보니 조용히 정우 곁을 지키시느라 자신의 삶을 많이 돌보지 못하시는 모습이 마음에 걸리곤 했다. 조용하고 수줍은 성품이라 가족들 외에 다른 사회적 관계망도 많이 없으시고 정우 데리고 병원과 치료실 오가는 일 외엔 주로 집에 계시는 편이라 들었다. 그래서, 말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고 소소하게 사는 이야기도 더 많이 들으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사실 다른 어머니들도 정우어머니와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런데, 왠지 정우 어머니는 더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구석이 있다. 동그랗고 순박한 얼굴에 흰 머리가 제법 보이는 염색하지 않은 머리칼. 야무지지 않은 말투에 머뭇거리는 표정이 요즘 젊은 엄마들과는 다른 친근함이 묻어난다. 언젠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우울증 치료를 계속 받고 계시다는 말씀도 하신 탓에 뭔가 밝고 건강한 에너지를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1층으로 내려오니 선선한 가을 바람이 얼굴에 와 닿는다. 시원하고 경쾌한 바람이다. 정우어머니와 나는 정우의 휠체어를 밀며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높다랗게 솟은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난 길을 빠져 나와 큰 길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길게 뻗은 차도 옆 아파트 담벼락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그리고, 우회전. 정우의 휠체어도 신나게 길 위를 미끄러지듯 굴러 간다. 정우는 마스크 위로 빼꼼히 큰 눈을 더 크게 뜨면서 하늘을 올려다 본다. 정우의 눈 속에는 어떤 하늘풍경이 담기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맞은 편 상가 빵집, 슈퍼, 반찬가게, 분식집, 인테리어가게와 부동산 간판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간다. 무심한 풍경들이지만 이 길을 처음 걸어보는 나에게는 약간의 긴장감과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다음에 정우랑 둘이서 올 때를 대비해 이정표가 될 만한 건물이나 풍경들을 스케치하듯 머리 속에 담는다. 무겁고 커다란 휠체어를 밀면서 걸어가는 동안 병우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본다. 날씨 이야기, 정우네 아빠 회사 이야기, 근처에 사는 시어머니와 시누이 가족들, 코로나 때문에 쉬고 있는 정우 치료실 이야기 등등 시시콜콜한 근황토크들이지만 40이 훌쩍 넘은 두 아줌마의 이야기는 끊기지 않고 가늘고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 앞에 펼쳐지는 탁 트인 가을 한 낮의 공원. 기대 이상으로 넓고 근사하다. 우리처럼 산책을 나온 아이들과 어른들이 드문드문 공원 사이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 나온다.

여기 정말 좋네요!


“그런가요?” 정우어머니가 수줍게 웃는다. 정우어머니와 나는 정우와 함께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보았다. 가을 언저리에서 만나는 공원의 풍경은 고즈넉했다. 이런 저런 가을꽃들이 풍성하게 가을맞이를 하고 있었고, 무르익은 초록 나뭇잎들 사이 드문드문 노랗게 물든 때 이른 단풍도 보였다. 무엇보다 갇혀 있는 집 안의 공기와 다른 무게와 냄새로 다가 오는 공원의 공기가 코를 통해 온 몸을 흠뻑 적셔 주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둥치가 굵은 나무 곁으로 다가가 정우의 손을 잡고 만져 보게 했다. 거칠지만 따스한 나무 표피의 느낌이 정우의 손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살아있는 온전한 감각. 내가 정우에게 보여주고 들려 주고 만나게 해 주고 싶은 것들. 오늘 그 수많은 것들 중 하나라도 꼭 전해졌기를 소망해 본다.  

“어머니, 정우랑 같이 사진 찍으세요.”

 나는 괜찮다고 사양하는 어머니 손을 이끌고 꽃밭 근처로 갔다. 두 모자와 가을 꽃길이 예쁘게 잘 어울린다. 비록 마스크를 써서 얼굴이 반밖에 나오지 않아 아쉬웠지만 엄마와 아들이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흐뭇했다. 카톡으로 전송해 드리면서 오늘 함께 한 시간이 정우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작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 가지 수업활동을 집에 가서 마무리해야 해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는데, 정우어머니가 공원에 올 때와 다른 산책로로 안내해 주셨다. 찻길이 아닌 조용한 산책로여서 좋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다양한 식물들과 작은 실개천이 있어서 볼 것과 들을 것들이 다양한 멋진 길이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중심가에 있는 대학병원에 갈 때 이 길을 이용한다고 하셨다. 아, 그랬구나! 정우 어머니는 부러 휠체어를 밀고 이 길을 걸어 와 1호선과 4호선 지하철을 갈아 타고 병원을 다녀오시는 거였다. 그렇게 그녀만의 방식으로 집 밖의 세상과 만나고 기억하고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새삼 정우어머니와 정우가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졌다. 다행이다. 택시를 타고 쌩하니 다녀오는 것보다 이렇게 길 위에서 만나지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위로받고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는 정우어머니와 함께 한 산책길에서 그녀의 삶의 한 자락을 함께 공유할 수 있어서 참 기뻤다. 그녀의 시선에서 이 길을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고 내가 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문 하나가 새롭게 열린 것 같아 감사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소소하게 할 수 있는 그 무엇들. 수퍼마켓에 가서 저녁거리를 장만하고, 빵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소보로빵을 사고, 동네 카페에 들러 달달한 아이스라떼를 사서 마시며, 근처 작은 공원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산책을 하는 일상의 조각들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 정우도 정우어머니도 나도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선명하게 살아있기를 바란다. 교사로 학생으로 학부모로서가 아니라 지구별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자연인으로서 말이다. 오늘 나는 길 위에서 그러한 순간을 만났다.


 길 위를 걷는다는 건 그래서 작지만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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