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꾸꾸 Jan 08. 2023

[발리] 우붓으로의 행복 여행 |1일

현재를 살게 해주는 우붓

 

2022년은 나에게 혼돈과 불확실, 그 속에서 성장과 단단해짐을 겪은 한 해였다.

매년 성장을 다짐하고 분주히 살아왔지만, 지난 27년은 나의 속도로 살았다기보다 창밖의 풍경이 지나가는 속도에 나를 끼워 맞춰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도 달렸던 것 같다. 올해는 처음으로 치열하게 앞으로 달려 나가는 세상에서 나 혼자, 브레이크를 밟았다.


브레이크를 밟았음에도 관성은 여전했고, 올 한 해 내내 나는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라는 압박감빨리 다음 해를 완벽히 계획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하루하루 나를 분주한 시간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그토록 숨 막히게 빠른 관성과 나만 멈추어버린 것 같은 조바심에서 벗어나, 그저 현재라는 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주어진 자유에 비례한 만큼의 불안 또한 나에게 찾아왔지만, 감내한 리스크만큼 또 성장했던 한 해였다.



그렇게 나는, 발리로 떠났다.



| 출국, 오전 11시 35분

오전 11시 35분이 주는 의미


23.01.02 | #인도네시아 가루다 항공


어렸을 적부터 절약이 몸에 밴 나는 여행할 때 비행기를 고르는 조건은 단 하나, '가격'이었다. 이 때문에 나는 항상 새벽 6시나 밤 11시와 같은 출국 시간 자체가 피곤한 시간대의 비행기를 타곤 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스스로 번 돈으로 떠나는 여행에서, 나와 눌은 16시간이 넘게 걸리는 저렴한 경유 비행기 대신, 비싸지만 좋은 시간대에 발리까지 직항으로 갈 수 있는 항공편을 선택했다.


"우리 이번 여행은 의미가 깊은 만큼, 우리들에게 모든 순간에 행복한 시간을 선물해 주자"


더군다나 출국 비행기가 1시간가량 연착되며 우연히 나와 눌은 공항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공항이란 항상 분주하고 바쁘게 면세품을 스치듯 낚아채 수령한 뒤 final call로 이름이 불리기 직전에 비행기로 후다닥 달려가는 곳이 아니었던가? 나는 처음으로 공항에서 여유롭게 출국의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2주 간의 발리로의 여정 중, 첫 여행지는 바로 요 가인들의 성지, 우붓이다.



| 우붓은 길고, 느리게 오는 곳


우붓은 정글 안에 위치해있는 곳으로, 흔히 상상하는 휴양지 바다는 찾아볼 수 없지만, 요가를 테마로 찾아온 장기 여행객들이 많아 일상의 느긋함을 즐기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몸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우붓거리의 모습


About Ubud City


우붓 자체는 센트럴지역과 센트럴외곽지역으로 나뉘고, 관광객이 갈만한 식당이나 요가센터, 관광명소(몽키포레스트, 우붓왕궁)들은 센트럴지역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우리는 매일 요가를 할 계획이었으므로 센트럴지역에 위치한 수영장이 딸린 작은 호텔에 묵기로 했다.


메이플 스토리 빌리지 안에 와 있는 것 같아

우붓거리를 걸어보면 매일같이 가보고 싶은 카페와 식당이 눈에 밟힌다. 그리고 왕복 2.5Km, 걸어서 30분 이내에 직선으로 쭉 뻗은 2개의 메인 스트리트에 대부분의 상점들이 모여 있어 호텔에서 무료 셔틀로 어디든 데려다준다. 돌아다니다 보면 이틀 전에 마주쳤던 사람을 마주치기도 하고,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Halo, Good morning 하고 미소 지어주는 발리 사람들의 모습에 마치 내가 메이플 스토리 빌리지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

여행객들이 대부분인 만큼 정말 어느 나라에서 방문해도 음식이 안 맞아 여행이 힘들었다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을 정도로 모든 나라의 음식을 팔고, 심지어 맛있다. 특히  나시고랭, 샌드위치, 브런치 심지어는 비빔밥까지 세계각국요리를 모두 모아놓은 식당이 많다는 점이다. 어릴 적 인도와 유럽에서 살았던 나의 친구 눈과 직접 향신료를 사서 요리할 정도로 이국적인 맛을 좋아하는 나의 궁합은 어떤 식당에서도 실망하지 않을 최고의 조합이었다.




| 숙소 - Green field hotel


발리에 오기 직전까지도 시험과 면접 준비에 분주했던 나와 눌은, 면접을 본 날 오후 카페에서 만나 급하고 단순하게 아고다 닷컴에서 정말 30분 만에 호텔을 덥석 예약했다.


발리 같은 휴양지에서 어딜 가든 좋지 않겠어?


그리고 밤늦게 도착한 숙소. 그런데 이곳, 뭔가 이상하다. 에어컨을 틀어도 사라지지 않는 습습함과, 불그스름하고 어두운 조명 불빛. 왠지 모를 퀴퀴한 냄새. 내가 상상한 럭셔리한 휴양지 리조트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곳, 뭐지?"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 밝고 숙소 밖 풍경을 마주하고 난 뒤, 우리의 실망은 이내 180도 바뀌었다.


어젯밤 칠흑같이 어두웠던 창밖에 금빛 푸르른 논밭 풍경이 펼쳐졌다. 청량한 풍경을 바라보며 발코니에 누워 책을 집어 들었다.


단출한 조식이 기대되는 이유는

조식은 단출하지만 옹골찼다. 계란을 스크램블로 할지, 수란으로 먹을지, 완숙 아니면 오믈렛에 치즈와 야채를 넣어 먹을지 고르는 재미, 그리고 매일같이 종류가 달리 나오는 빵과 팬케이크로 인해 묘하게 아침이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빵과 계란, 버터만 있으면 만족스러운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우리들에게 아침에 일어나 다시 느낀 우리의 숙소는 느긋한 우붓의 정취를 느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이곳에서 지낼수록 숙소의 숨은 매력을 하나씩 발견해가며 점점 이곳에 적응하고 만족할 수 있었다.


| 발리의 1월 날씨


발리의 10월부터 3월은 우기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한국의 장마철처럼 종일 내리는 비를 상상했는데 발리의 우기는 달랐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눈 깜짝할 새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새파란 하늘이 펼쳐진다.

미친듯이 비가 쏟아진 후 순식간에 찾아온 맑은 하늘


"발리 비는 두 시간이면 그쳐요"

택시 아저씨가 말해줬다. 건기여도 비가 내리면 이렇게 갑자기 비가 내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먹구름이 걷힌다고. 심지어 내 머리 위에만 비구름이 있을 때도 있다.


비가 지나가고 나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크게 땀 흘릴 일도 없는 우기가 우린 꽤 만족스러웠다. 발리의 우기가 여름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와 눌은 발리의 우기가 여름인 걸 처음 알았다. 건조하고 시원한 날씨.

"발리의 건기인 겨울은 지금보다 더 날씨가 좋구나."

근데 뭐 그래도 지금 날씨도 나쁘지 않았다.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른다는 불확실함은 반대로 비가 내려도 금방 그칠 것이라는 기대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우붓을 여행하는 법


우붓카페 Monsier Spoon

#발리카페 #우붓카페 #Monsier_spoon


우리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여유롭게 카페에서 책 읽기였다. 참 웃긴 게 한국에서 하고 싶은 게 발리에서도 하고 싶다는 것이다. 눌과 나는 인턴 생활을 마친 뒤 같은 시기에 휴식기를 가진 만큼 1년 간 참 많이도 붙어 있었다. 그만큼 하고 싶은 것도 시간을 보내는 방식도 비슷해 매일같이 카페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시간을 가졌다.


카페에서 책읽는 할아버지


발리 우붓에는 괜찮은 카페가 많다. 외국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브런치나 빵을 파는 카페가 많다. 장기 여행객이나 느림과 여유를 즐기고자 방문한 사람이 대부분이라 그런지 사진 찍기 바쁜 사람들보다는 종이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제각기 할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내 뒤에서 책 읽기에 열중인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잠시 나이 들었을 때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빵과 커피가 맛있는 우붓

커피 가격은 대부분 3000원대. 외국인 여행자가 대부분이라서 메인 길거리의 음식점들 중에는 식사 메뉴 가격이 한국과 차이가 없는 비싼 메뉴들도 많지만, 카페 음료는 저렴한 편이다. 참고할 것은 카페나 식당들 중에 계산할 때 메뉴값에 서비스 비용을 추가로 청구하는 곳이 꽤 많다는 것이다. 알아서 팁을 5~10% 가져가서 계산할 때는 5000루피아(약 400~500원) 정도 더 나온다. 결과적으로 한국돈 3500~4000원 정도로 커피를 마시는 셈이다. 그럼에도 빵이나 커피가 대부분 2~3000원대로 매우 저렴해서 빵+커피 러버인 나에게 정말 이곳은 천국이었다.


If you have any allergy, please tell me

발리는 신들의 섬이라고 일컬어지는 만큼, 힌두교를 중심으로 발리 토착 신앙과 인도의 불교가 융합한 종교이다. 그만큼 거리에 신당이 곳곳에 있고 매일같이 향을 피우며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 식당을 가더라도 "If you have any allergy, please tell me"라는 질문과 함께 식습관에 대한 옵션을 제공한다.


커피마저 그랬다. 아몬드 밀크, 코코넛 밀크, 소이 밀크 등 우유를 마시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거의 모든 카페에서 우유 변경 옵션이 정말 당연하게 있었다. 라테를 굉장히 즐기는 나에게 다양한 맛의 라테를 먹을 수 있다는 점은 정말 또 다른 행복이었다. 단, 저렴한 커피값에 비해 옵션 변경 값이 비쌌다는 점. 커피가 35000루피아( 2800원)이면 우유 옵션 변경 시 10000~15000루피아(800~1200원) 정도.




칼로리 면죄부, 여행

뺑 오 쇼콜라. 입안에 퍼져나가는 버터향과 초콜릿의 달달함에 라테 한 모금. 평소에는 좋아하기 때문에 한없이 먹을 것을 방지해서 오히려 빵과 초콜릿을 자주 먹지 않지만, 사실 커피엔 달달한 디저트가 최고의 궁합이다. 하지만 "여행 중이니까 괜찮아"


인도에서 6년을 살았던 놀이 정말 먹고 싶었던 인도의 길거리 간식 "빠니 뿌리(pani puri)"를 먹으러 인도음식점에 방문했다.



우붓식당 Chai of the tiger

#우붓식당 #빠니뿌리 #panipuri


인도의 길거리 음식을 파는 식당, Chai of the tiger이다. 2021년에 발리에 휴식차 왔다가 발리가 좋아 정착하게 되었다는 부부로 인도의 길거리 음식을 사랑해 식당을 열게 되었고, 각종 소스, 요거트, 사모사(인도식 튀김) 등 모든 재료를 핸드메이드로 만든다고 한다.


아내분이 인도사람인 것 같은데 암튼 국제결혼이다. 발리에 어떤 음식점을 가도 세계 각국의 음식을 현지 맛 그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여행객들이 휴양을 왔다가 그대로 정착해 식당을 열거나 오랜 기간 여행객들로 가득해 세계 각지의 피드백을 받아왔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시킨 요리는 Pani Puri(빠니 뿌리)와 Chole Boleh(쫄레볼레) 그리고 닭꼬치인 sate(사떼)라는 음식으로, 여기에서 파는 음식들에는 기본적으로 Chatt (짯)라는 속재료가 들어간다.


Chat

병아리콩, 감자, 토마토 등 다양한 재료를 버무려 만든 속재료이다. 이 재료는 빠니 뿌리뿐만 아니라 촐레 뽈레 등 다른 메뉴에서 함께 나오는 과자 같은 음식에 올려 먹는 만능 재료이다. 과카몰리 같은 느낌?

Pani Puri (빠니 뿌리)


녹두 반죽을 얇은 공 모양으로 튀겨 안쪽 빈 공간에 chatt라는 속재료를 넣고, 시큼하고 달짝지근한 타마린드 물을 부어 먹는 별미이다. 역시나 비건과 채식주의자 옵션은 기본이다.


뿌리는 이 음식의 공갈빵 같은 겉껍질로, 통밀반죽을 얇게 구워 속이 빈 공모양으로 부풀어 오르면 뚜껑을 뚫어 안쪽에 재료를 넣고 소스를 뿌려 먹는다. 빠니는 물이란 뜻으로 빠니 안에 뿌려 먹는 향신료 물이 이 메뉴의 포인트이다.


기본적으로 초록색의 시큼하고 달짝지근한 타마린드 소스dahi라는 요거트 물 소스를 함께 뿌려 먹는다. 뭘 부어 먹어도 맛있어서 먹을 때는 그냥 뭔지도 모르고 먹었다.

Chole Boleh (쫄레 볼레)

토마토, 오이, 크런치 누들, 병아리 콩 그리고 인도네시아 요리에서 자주 쓰는 마늘 크기의 양파인 shallot을 섞은 속재료를 저 과자에 올려 먹는 메뉴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 속재료가 빠니 뿌리 안에도 들어가고 닭꼬치 사떼와 쫄리 볼레뿐만 아니라 모든 메뉴의 기본 베이스로 쓰이는 것 같았다. 요거트와 타마린드 소스의 시큼 달짝지근에 어울리는 맛. 인도 음식 향신료가 가미된 멕시칸 음식 같기도 하다.


이 집 닭꼬치(사떼)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밍밍하고 그냥 닭가슴살 맛이라서 패스.


특이한 음식이나 식재료 맛보는 것을 굉장히 즐기는 나로서는 이국적인 요리들이 한 곳에 모인 우붓 거리가 굉장히 천국 같다.




| 현재를 살게 해주는 우붓


매일같이 요가 클래스를 듣고 정말 단순하게 어떤 커피를 마실지, 오늘 저녁 메뉴는 어떤 게 좋을지만 고민하는 하루들을 보내며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고 있구나'


평소에 나는 매일 밤 자기 전, 자투리 시간마저 생산적으로 보내기 위해 시간 단위로 다음 날 하루 일정을 채워 넣었다.


그런데 왜 그래야 했을까?


시속 120km로 달리는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서 나는 100km를 꽉 채워 달려도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내일을 계획하고, 내일을 계획하기 위해 매일 밤 시간을 내는 나는 계획하기 위한 시간마저도 계획했다.


서울과 발리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마치 상대성 이론처럼.

그리고 모두가 함께 느리게 걷는 발리에서 현재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방향을 잡지 못해 비틀거릴 때 일단 많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는 것도 좋은 선택이지만, 그와 동시에 잠시 멈추어보는 것도 꽤나 큰 깨달음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매거진의 이전글 실패를 실패라 여기지 말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