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아도 움직일 수 있는 힘
쉬면 쉴수록 더 늘어지고, 움직이는 데 더 많은 의지가 필요하듯이 관성의 법칙은 마음에도 적용된다. 무슨 말이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바쁠 때 더 바빠지는 것보다 한가할 때 생긴 일이 더 하기 싫다는 것이다. 작살나게 바쁠 때 일이 하나 더 추가된다 한들 별 타격이 없는 반면, 한가한 당직시간에 '오늘 밤은 조용하겠지' 하며 침대 위에 누워있을 때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때 조금만 더 느적대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내적 갈등은 오히려 나를 괴롭힐 뿐, 게으른 몸을 일으켜 움직임에 돌입하면 오히려 그 다음은 수월해지기 마련이기에, 재빨리 관성을 이길 장치를 마련해둘 필요가 있다. 나를 위해서도, 내가 보는 환자를 위해서도 말이다.
어제도 조용한 금요일 밤이 되길 바라며 한참 당직실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기 지겨워질 때쯤,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선생님, 어제 출생한 아가인데 열이 나서 신생아실에서 모니터링하고 있어요“
두근. 열이 나는 아기는 처음이었다. 진짜로 열이 나는지, 아기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아기를 볼 때 어려운 점은 성인과 비교하여 기준치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체온도 시간별로 크게 널뛰고, 조금만 따뜻하게 방 온도를 올려놓으면 아기 체온도 덩달아 높게 나온다. 이런 이유로 37.7도라 한들 의미있는 열이라고 바로 단정짓기 어렵기 때문에 아기의 상태나 검사수치 등을 함께 봐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소아는 성인과 아예 다른 개체라는 사실이 마음에 크게 와닿는다. 아직 한 달 남짓. 이제 조금씩 아기들의 모습을 보고 힘든 건지 아닌지 구분이 가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지 않는 아기들을 볼 때면 여전히 추측과 추론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이다.
”음, 선생님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모르겠네요. 윗년차 선생님께 상의드리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내가 모르겠다는 사실을 안다. 이전에는 내가 이걸 몰라도 되는 건가 싶어 고민하고 책을 뒤적이느라 애꿎은 시간만 흘려보낸 뒤 땀을 삐질 흘리며 쭈뼛거리며 윗년차 선생님께 달려갔는데, 이젠 조금 더 빨리 내가 모르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 교수님도 모르면 '모르겠네요'라고 하시는 것을 보며, 모르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모르기 때문에 이런 검사를 하는 것이고,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상의가 필요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은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한 시간 뒤에 다시 열을 재보기로 했다. 열이 난다고 모두 바로 피검사나 이런 저런 사진을 찍어보는 것이 아니다. 필요 없는 검사를 과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일시적인 열인지 아닌지 구분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미성숙한 아기는 적은 균에도 순식간에 상태가 나빠질 때도 있고 드물지만 없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은 무서운 점이다. 그래서 언제까지고 ‘경과관찰 할게요‘를 남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do no harm"
의사는 언제나 필요 없는 검사와 필요한 검사를 가르는 기준 사이를 줄다리기 한다. 그 사이에 불안과 의심 그리고 경험과 직감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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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뒤에 다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아기가 분유를 먹는데 산소포화도도 떨어집니다.”
당장 아기를 보러 갔다. 직접 아기에게 분유를 먹여보았다.
꿀떡 꿀떡 꿀떡.
쪼꼬미 입술로 분유를 꿀떡꿀떡 삼키는 요물조물한 모습이 너무나 귀여운데 산소포화도도 같이 떨어졌다. 천천히 뚝, 하고 말이다.
미숙아는 아직 삼키는 능력이 덜 발달한 채로 태어나서 먹을 때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는 게 흔한 일이지만, 건강하게 만삭으로 태어난 아기에게는 드문 일이다. 물론 대부분은 출생 초기의 일시적인 현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낮은 확률일지라도 최악의 경우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 아직 아기는 세상에 홀로 적응할 준비를 덜 마친 미완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면밀히 관찰하기 위해서 신생아중환자실로 갈게요."
"아 잠깐, 10분만 더."
이 말에 어떤 상황이 떠오르는가? 출근하기 싫어 씻기를 포기하고 조금만 더 누워있으려 하는 직장인, 하던 게임을 접고 학원에 가야 하는 학생 등. '10분만 더'라는 문장은 우리 모두의 삶에 파고들어 있는 문장이다.
이처럼 우리는 즐겁고 편안한 상태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편안한 상태가 지속됐을 때 우리는 이내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하루종일 넷플릭스를 보고 누워있던 하루의 끝의 찝찝함과 비교했을 때, 잠깐이라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햇빛을 쬐러 아파트 문 밖을 나선 뒤의 기분은 예상 외로 상쾌하고 시원했던 적이 있지 않은가? 지금의 상태가 편하고 익숙할수록 변화를 가로막는 관성이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상태가 나에게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이유다.
그래서 우리는 관성을 이겨낸 뒤의 짜릿한 승리감을 맛보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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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일을 할 때 늘어진 몸을 벌떡 일으킬 수 있도록 나에게 마련해둔 장치는 바로 최악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잠시 미적거렸다가 아기한테 무슨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어서 빨리 가보자.'
2주만의 주말 투오프를 앞두고 토요일 아침에 퇴근하며 병원카페에 들렸다.
밤에 일을 할 때 나를 움직이게 하는 장치가 '최악을 생각하기'였다면, 일주일을 굴러 가도록 하기 위해 마련해둔 장치는 주말 끝의 운동과 시원한 커피 한 잔이다.
매일 아침 정확히 6시에 집을 나서기 위해 5시 반에 기분 좋게 일어나기 위해서는 항상 짭쪼름한 버터와 고소한 동네 빵집의 호밀빵을 먹는다. 빵과 버터를 먹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전날 일찍 자야 한다.
매일이 행복과 설렘으로 가득한 삶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사람이라면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매일 같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선다. 이런 일상을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굴러가게 하려면, 일상 곳곳에 작고 소소한 행복 장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기대감.
일상 곳곳의 기대감이 드는 일들을 계획해두는 것이다. 빵을 먹든, 커피를 마시든, 낮잠을 자는 것이든, 동료와 수다를 떠는 일이든,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것이든, 그 무엇이어도 좋다. 그렇게 우리는 결과가 아닌 과정을 즐기는, 오늘이 행복한 삶에 한발짝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