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잘 될 거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다섯 살 아이의 삶은 불안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이 곧 젊음이고,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책 ⟪생각하는 인간은 기억하지 않는다⟫ 중에서
며칠 전에는 일 년에 두 번 정도 만나는 인턴 때의 친구 규동이를 만났다. 규동이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명석하고 총명한 비글 같은 친구이다. 말 그대로 호기심이 많고 두뇌회전이 빨라 공부하는 것도 좋아할뿐더러 말솜씨와 이해력도 좋아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나의 말을 chat GPT처럼 요약까지 해주는 사람이다.
"누나,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절반은 교수직으로 남거든.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적당히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참 적은 것 같아.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 내가 이렇게 학문적 즐거움을 좇기보다 다시 임상 전공으로 진로를 변경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런 규동이는 예방의학과 전공의이다. 예방의학은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역학, 통계를 주로 다루는 학문으로 실제 환자를 보는 것보다는 데이터를 가지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을 메인으로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사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연구자로서의 의사인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규동이는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즐겁기도 하지만 문득 수년 뒤 미래의 불확실함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고 했다. 내 눈에 규동이는 총명함과 명석함 그 자체인 친구라 그 친구의 미래가 전혀 걱정될 것이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집에 가는 길에 규동이에게 문득 떠오른 책 속 글귀 하나를 보내주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다섯 살 아이의 삶은 불안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이 곧 젊음이고,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you have a potential!
우리에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떨어지면 어쩌지?”
"만약 내가 그 사람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거절을 당하면 어쩌지?"
"내가 선택한 이 길이 과연 내게 맞는 길일까?"
걱정은 결정되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걱정이 심하면 불안한 마음이 들고, 과한 불안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실제로 부정적인 결과와 "그거 봐, 내 말이 맞잖아. 해봤자 안 되는 게 맞았어."라는 확신으로 이어지게 되는 경험은 다들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걱정과 불안이 우리에게 안 좋기만 한 것일까?
내가 의대생이 되고 나서 한동안 깊게 고민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미래가 훤히 보인다'는 것이었다. 인생이라는 길목의 끝이 너무 명확해 보인다는 것이 지루해 보였달까? 물론 굽이굽이 흐르는 길목들에는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나겠지만 말이다.
<이대로 살다 보면, 레지던트를 하고, 펠로우를 하고, 전문의가 된 다음에 계속 같은 일을 하다가 늙은 의사가 되거나, 만약 교수가 된다면 평생의 시간을 이 작은 병원에 몸 바치다 죽게 되겠지??>
라는 생각이었는데, 당시의 나는 그게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한 때는 필사적으로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 알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해본 것 같다.
그런데 참 웃기게도, 자유의 바다에 던져져 프리랜서로 살아갔던 작년의 나는 불확실함으로부터 오는 불안감을 온몸으로 후드려 맞았다.
'한 달 뒤에 나는, 내년의 나는 대체 뭘 하고 있을까...?'
'나는 뭘 할 때 행복할까?'
불확실한 현실에 퐁당 빠진 하는 확실한 실체를 손에 쥐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함에서 오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무던히도 상상 속 시뮬레이션을 돌리곤 한다. 비 오는 날 자가용 대신 지하철을 택하는 것부터, 더운 여름날 식당 웨이팅이 길 것을 대비하여 주변의 다른 가게들도 여럿 찾아두는 것과 같이 간단한 시뮬레이션으로 확실한 플랜 B를 세울 수 있는 상황이 있는 반면, 인생의 큼직한 일들의 플랜 B는 불확실한 가정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 번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험으로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고, 따라서 자기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_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62
그리고 불확실함 가운데 어느 한 길을 택해 나는 지금 이곳, 소아청소년과에 와 있다. 감정을 따른 것일까 열린 문을 따라 걸었을 뿐인 걸까? 어찌 되었든 지금 나는 이곳에서 매일을 최선의 하루를 보내고, 배움과 함께함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불확실함의 갈림길에서 마음속 첫 번째 길이 아닌 구석진 길을 선택해 걸었던 경험을 반복해 본 결과,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움 꽃길을 핸드폰만 보며 걸을 수도 있는 반면, 투박하고 거친 시멘트 길을 걷더라도 틈새로 삐져나온 제비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 감탄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확실함은 설렘이기도 하다. 환희의 순간은 확정되지 않은 일의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의 고요한 불안 뒤에 올 때야말로 극적이다. 마치 영화의 클라이맥스, 최고조로 치달은 갈등이 한순간에 해소되고난 뒤의 평화가 주는 여운과 감동처럼 말이다.
간절히 바라던 일이 좌절된다면 슬퍼 마땅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확정적으로 정해진 상황이 불안감을 씻겨낼 수는 있어도 이내 지루함이 깃들 것이란 사실을 떠올려보자. 분명 당신은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 불확실한 상황 속으로 뛰어들려고 할 것이다.
우연히 마들렌
어제는 병동이 워낙 바빴던 나머지 밥도 당직실에 있는 컵밥에 데우다 만 닭가슴살을 급하게 올려 먹고 일을 하던 와중에 진정 동반 콜이 왔다.
병동에 틀어박혀 있던 나는 영상검사실에 내려간 김에 잠깐 숨 좀 돌리자 하고 병원 카페에 들렀다.
“아바라 덜 달게 한 잔이요”
나름 몸매를 생각한다고 아이스라떼만 마시는 나지만, 오늘 같은 날은 당충전이 필요했다.
“이거 유통기한 2일 남은 마들렌이라 같이 챙겨드릴게요. “
우연히 내게 온 마들렌의 달달함은 답답한 하루에 작은 숨통의 창문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당직이 끝난 날 아침부터 최애 베이글 가게로 향했다. 고통 뒤의 쾌락이 이런 것일까?
그리고 오늘은 수도꼭지 물밀듯 일이 쏟아지던 지난 3달이 지나고, 새로운 파트로 옮긴 날이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번 파트에 오게 되어 입꼬리가 귀에 걸리고 광대가 하늘로 치솟은 나는 아래층에서 고통받고 있을 친구들을 응원하러 커피를 사들고 내려갔다.
아바라(아이스바닐라라떼), 아마라(아이스마카다미아라떼), 아녹샷(아이스녹차라떼샷추가). 한 명 한 명을 떠올리며 음료 주문을 하다 보니 참 다들 취향도 확고하다는 걸 새삼 깨달은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