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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혜성 Nov 03. 2023

[미술] RM이 선택한 한국작가 3인

권진규 강요배 손상기

 최근 미술계에 이런 말이 있다. ‘전시는 RM이 간 전시와 안 간 전시로 나눠진다.’ SNS에 ‘#RM투어’를 달고 업로드된 전시관람 인증사진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예술 서적은 RM의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줌과 동시에 그의 취향을 대변한다. RM은 2018년부터 꾸준히 작품을 컬렉션하며 미술 애호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기존에도 연예인 컬렉터들은 있었다. 탑(최승현)은 생존작가 중 가장 위대한 현대미술가로 불리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예술가들의 뮤즈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오타쿠 최대 아웃풋 무라카미 다카시(Murakami Takashi) 등 세계적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수입의 95%를 미술작품 구매에 사용한다 밝히기도 했다. 지드래곤도 영국의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미국 보스턴 출신의 조나스 우드(Jonas Wood)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2015년엔 서울시립미술관과 협업해 자신의 소장품을 포함한 기획전을 열기도 했다. 이처럼 기존에도 연예인 컬렉터는 있었지만, 미술계는 ‘컬렉터 김남준’의 행보에 이전과 다른 반응을 보인다.


 RM의 미술관 투어 취향은 확실하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장거리 이동을 마다하지 않는데, 전국 각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을 감상하기 위해 대구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을 방문했다. RM 솔로 앨범 《indigo》에 영감을 준 윤형근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베니스 포르투미술관, 미국 뉴욕의 데이비드즈위너 갤러리, 텍사스의 외진 마파의 치나티재단까지도 찾아갔다. 그는 인터뷰에서 “지난 2019년 베니스의 포르투니 미술관에서 한국의 추상미술가 윤형근의 전시를 보았고, 그 후 미국 텍사스의 치나티 재단에서 도널드 저드의 입체작품과 함께 전시된 윤형근의 회화를 보면서 그에게 무한한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라 회고했다.

 그는 작품 수집에도 명확한 기준이 있다. 주로 근현대 한국작가, 한국 근현대 작품에 애착을 보인다. 그 근간은 무엇일까? 바로 뿌리다. “내 뿌리는 한국에 있다. 한국전쟁과 군사독재, 경제적 불안정을 겪은 세대를 중심으로 작품을 수집하고 있다”라고 밝히며 한국인 정체성과 뿌리에 대한 질문의 답을 미술에서 찾는다. RM은 작품의 조형미만큼 작가의 생애와 철학에 집중하고 있는데, 작품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품 도록이나 작가 전기를 찾아 읽고 공부하며 애정을 쏟는다.

 2022년 12월 채널 BANGTANTV에 공개된 ‘RM All Day(with 김남준) part 1’ 속 RM의 집은 미술관을 연상하게 했다. 많은 도록과 예술서적, 벽마다 자리하고 있는 그림들. 그중 80%는 한국 근현대 미술작가의 작품이었는데, RM의 솔로앨범 《indigo》의 모티브인 윤형근과 그의 장인인 김환기 작품을 비롯해 이배, 강요배, 이승조, 권진규, 유영국 등 총 12명의 작가 작품이 화면에 등장했다. 이 중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작품에 시대를 담은 3명의 작가의 생애를 통해 RM이 찾는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보자.



권진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건칠(乾漆)을 되풀이하면서 오늘도 봄을 기다린다”

권진규 아뜰리에

 서울시립미술관은 2022년 조각가 권진규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 를 개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리움 등의 소장품과 유족의 기증품, 개인 소장자에게 대여받은 작품을 한자리에 선보였는데, 이 중 개인 소장자 김남준의 소장품 <말>(1965) 이 포함되어 화제가 되었다.


 1922년 함흥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권진규는 1943년 일본에 건너가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과 징용으로 학업은 중단됐다. 이후 극적인 생환 끝에 해방을 맞이하고 1949년 다시 일본의 무사시노 미술학교에 입학, 시미즈 다카시의 제자로 들어가 본격적인 조각가의 길을 걷는다. 졸업 후 1959년까지 여러 공모에 입상하고 같은 아뜰리에에서 공부한 서양화과 오기노 도모와 결혼 후 터전을 잡게 된다. 하지만 노모의 간병을 위해 홀로 귀국한 그는 서울 성북구로 돌아와 아뜰리에를 만들고 창작을 이어갔다.

 권진규는 한국 전통문화에 지극한 관심을 가졌다. 61년에 숭례문 수리 복원 사업에 제도사로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 전통 목조 건축구조의 심미성에 매료된다. 특히 우리 전통 건축에서 중요한 공포(목조건축물에서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춘 부재)를 관찰해 드로잉과 설계도면으로 기록했다. 권진규는 <지원의 얼굴 >(1967)로 대표되는 여성흉상으로 유명하지만, 동물상(특 히 말), 자소상, 잡상, 기물에 이르는 작품도 남겼다. 특히 경복궁 같은 조선시대 정궁, 궁전을 연구하게 되면서 지붕 처마 끝에서 내려오는 곳에 있는 잡상이나 토기를 자신만의 한국적 리얼리즘으로 만들고자 했다. 우리 전통 조각에 애정을 쏟으며 테라코타와 더불어 국내에선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간소화된 고려시대 건칠 기법을 이용했다. 그는 71년 명동화랑 개인전을 앞두고 신문 인터뷰에서 이런 바람을 남겼다.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다” 서양의 리얼리즘이 아닌 우리 전통에 바탕을 둔 한국적 사실주의를 소망했던 그는 추상미술의 유행에 밀려 생전엔 주목받지 못했다. 2년 뒤인 1973년 5월 4일, 권진규는 고려대 미술실에 전시된 자기 작품을 마지막으로 감상하고 성북구 아뜰리에로 돌아와 생을 마감했다.




강요배

“나를 알려면 나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게 나에게는 고향의 역사였다”


강요배 출처:대구미술관

 2020년 RM은 위버스에 최근 빠진 책으로 『풍경의 깊이』를 소개했는데, 출간된 지 한 달도 안 된 따끈따끈 한 강요배 작가의 산문집이었다. 그리고 1년 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강요배의 개인전 《카네이션: 마음이 몸이 될 때》를 관람 후 방탄소년단 트위터에 <먼나무>(2020)를 올렸는데, 이 작품은 RM의 브이로그에서 다시 등장한다.


 52년생인 작가는 한국전쟁 중 제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강요배'라는 이름에서부터 제주의 역사가 드리워져 있다. 제주 4.3 사건을 몸소 겪으신 작가의 아버지께서 동명이인의 경우 확인하지 않고 사살하는 것을 목격하시고, 흔한 이름을 피하기 위해 첫째 아들을 거배, 둘째 아들을 요배라 이름 지으셨다. 작가는 그해 제주의 봄을 겪지 않았지만, 태생부터 함께한 셈이다.

 강요배는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한동안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신문 삽화를 그리고 그림책을 내며 생활하다 개인전을 위해 89년부터 3년간 서울 근교 농가에서 50점의 <4.3 연작>을 창작했다. 당시는 언급이 금기된 4.3 사건이 현기영의 『순이 삼촌』 (1978년)으로 세상에 알려져, 4.3 사건의 구술 자료화와 진상규명이 진행되던 때였다. 그는 혹여라도 고향의 아픔을 잘못 표현하지 않기 위해 3년이란 시간 동안 많은 자료를 탐독하며, 고향 땅의 애끓는 역사, 긴 세월 입에 올리지도 못한 슬픔을 화폭에 옮겨냈다. “가슴속 응어리의 정체를 밝혀보자 시도한 것이 제주민중항쟁사 그림이다” (강요배) 그 작품들로 92년 개인전 《동백꽃 지다》를 열었고, 전시는 성공적이었다.

 작가의 올곧은 태도는 일흔을 앞둔 나이에도 변치 않았다. 2021년 《카네이션: 마음이 몸이 될 때》에서 발표한 <코발트>(2021)는 1950년 대구 코발트 광산에서 자행된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사건이 주제이다. 인터뷰에 의하면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사건에 관해 공부하고 고민했다고 말한다. 강요배는 여전히 삶의 터전, 땀이 밴 곳, 피가 흐른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창작으로 기록하고 있다. 끈질기게 파헤치고 겸손한 예술가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알려면 나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게 나에게는 고향의 역사였다”




손상기

“장애물이 많은 도시 나에게 서울은 벅차다. 육교, 지하도, 넓은 건널목 그리고 소음, 한겨울에 에이는 추위, 밀리는 사람들의 표정 없는 얼굴들...”

손상기

 DVD 《BTS Memories 2020》속 밥을 먹고 있는 RM 옆에 놓인 한 권의 책. 『요절』(2002)은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12인의 예술가를 다루고 있는데 그중엔 한국의 로트렉 손상기 화백이 있다.


 손상기는 1949년 여수에서 태어나 삶을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했다. 그는 3살부터 앓은 구루병과 10대에 겪은 사고로 인해 하반신 성장이 멈춰 상반신만 자라는 불구로 살았다. 불편한 몸 때문에 집에 머물며 창밖만 바라보는 일상은 그를 그림에 몰두하게 했다. 나름 소질이 있어 어릴 때부터 많은 실기대회에서 수상을 하고 이후 원광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해 창작을 이어나갔다.

 1979년, 그는 졸업 후 고향인 여수를 떠나 서울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70-80년대 빈익빈 부익부가 가속도를 내기 시작한 서울은 몸이 불편한 이방인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손상기 작가는 이런 80년대 분위기를 담은 연작을 탄생시키는데, 바로 <공작도시> 시리즈이다. 공작도시는 빈곤과 풍요를 한 폭에 그려내며 혼돈 속 대한민국을 보여준다. 가파른 언덕길에 빼곡히 채워진 집들과 아이를 업고 머리에 짐을 이고 있는 어머니, 한 손에는 확성기를, 다른 손에는 손수레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는 남성을 통해 그 시대 가장의 고단한 하루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특히 비탈길에 늘비한 서민의 집과 육중한 콘크리트 담벼락을 가진 고급 주택은 발전해 가는 사회와 비례로 가속화되는 빈익빈 부익부의 표상이다.

 일찍부터 화랑과 함께 일하게 된 작가는 꾸준한 창작활동과 전시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3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데, 작가로 활동하는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1,500여 점의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RM의 브이로그 속 <학교가 있는 언덕>(1987)과 <이른 봄>(1987)은 작고하기 1년 전에 그려진 작품이다. 작가는 마지막 1년의 1/3을 투병하기 위해 병원에 있으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부지런히 붓을 움직이며 마지막까지 격변의 한국 사회를 기록했다.




 RM의 올 초 스페인 매체와의 인터뷰가 화제다. RM은 “k팝의 젊음, 완벽에 대한 숭배, 과도한 긴장감 등은 한국 문화적 특징인가?”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한국은 침략당했고, 파괴되었으며 두 개(남과 북)로 쪼개졌다. 불과 70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연합 (UN)의 도움을 받는 나라였지만 이제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람들이 발전을 위해 처절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k는 우리 선조들이 쟁취하려 노력한 품질보증 같은 것이다.”

 그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다. 이는 그가 꾸준히 한국 근현대역사와 문화를 탐구해 온 자신감이며, 근현대를 관통하며 혼란의 시기에 자신과 사회, 시대정신을 놓지 않은 예술가에 대한 존경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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