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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음악산책

서른 살의 싱클레어

심규선 - 데미안 듣다가

by 고요한

즐겨찾기를 정리했다. 브라우저를 켜자마자 항상 탭을 예닐곱개씩 띄우게 만들던 커뮤니티들이 정리 대상이었다. 영화나 음악처럼 정보를 얻어야 하는 사이트는 빼고 잡담위주의 공간들은 이제 내 즐겨찾기에서 사라졌다. 스마트폰에 깔았던 어플리케이션도 지워버렸다. KMRA처럼 거의 운영자 수준으로 상주하며 게시물도 올리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곳은 없었지만 거의 10년을 함께 한 사이트들이라 시원함보다는 섭섭한 마음이 컸다.

정리한지 열흘쯤 지나니 사소한 일상의 변화가 생겼다. 자잘한 것도 많지만 가장 큰 변화는 심심함을 느끼게 됐다는 점이다. 초단위로 새 글이 올라오는 커뮤니티 3개만 열어도 눈과 손이 바쁘다. 비록 그 글들이 이 사이트, 저 사이트에서 구르고 구른 중복뒷북이라고 해도 말이다. 댓글은 게시물에 또 다른 정체성을 부여한다. 같지 않지만 똑같은 게시물을 열람하는 횟수만큼 심심함과의 거리도 멀어져 갔다.

자극과의 결별을 선언한 뒤로 한동안은 심심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앉아도 보고 일어나도 보고 서있기도 했지만 게시물과 댓글 없는 시간들은 더디게만 흘렀다. 그러다 전자책 생각났다. 마침 얼마 전 교보문고에서 이벤트 할 때 받아둔 고전소설 50권이 있었다. 고전소설을 꼭 읽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릴 시절을 만화책과 양판소로 허송세월을 했던 탓에 알게 모르게 생긴 자격지심도 고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동트는걸 보며 『데미안』의 주인공 이름이 데미안이 아니었다는 것. 『달과 6펜스』 어디에도 달과 6펜스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막 젊은 보스가 조르바를 만난 상황이다.

지구력이 약하고 집중력이 좋지 않은 내가 언제까지 이 고전들과 함께 할지는 모르겠다. 한 문단씩 이어지는 지루한 묘사가 이어지는 전형적인 고전이 아니라 재미를 붙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뭘 해도 싱숭생숭한 연말이라 그나마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이나 뒤적이며 사치 아닌 사치를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후로 어떤 문장을 덧붙이더라도 당장 내일 일도 모르겠는 건 변하지 않는다.

결국 예전의 즐겨찾기를 정리하며 얻게 된 새로운 즐겨찾기에 정을 붙이는 게 2015년을 5일 앞둔 내가 세울 수 있는 가장 조그마한 새해 다짐 하나 아닐까싶다. 이 다짐이 부디 내년까지 이어지길 바라며 『데미안』의 넘나 유명한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ß eine Welt zerstören. Der Vogel fliegt zu Gott. Der Gott heißt Abraxas.)”




2014년 발표한 정규 2집 [Light & Shade]의 챕터1의 더블 타이틀곡이다. 금방 나올 것 같던 챕터2는 1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난 15년 11월에 발매됐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챕터2에는 ‘달과 6펜스’가 수록됐다. 데뷔 이후 꾸준히 음악활동을 하며 나쁘지 않은 음악을 내는 부지런한 뮤지션인데 언제부턴가 고만고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무난함의 껍질을 깨고 모두 깜짝 놀라게 만들 음악을 보여줄 때도 됐다.




심규선 – 데미안

새들이 날아오를 때
그리운 곳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오고
문득 고개를 들어
저 하늘을 바라보겠죠

쉼 없이 늘 앞만 보고 달려
다다른 곳 그곳이 어디든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젠 알게 됐으니
두 번 다시는 흔들리지 말고 가

묶인 것에서 너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
멀리 있지 않아요
끝없이 바람과 후회가 밀려와도
추락하면서 날아오르는 새처럼
Go Forward

끝없는 길 잃어버린 기억
소중한 건 놓치고 나서야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이젠 알게 됐으니
두 번 다시는 돌아보지 말고 가

묶인 것에서
갇힌 것에서 너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
멀리 있지 않아요
끝없이 바람과 후회가 밀려와도
추락하면서 날아오르는 새처럼
Go Forward

우리가 만든 가면은 우리의 얼굴이 돼요
슬퍼하기에 삶은 덧없이 짧고
후회하기엔 일러요
추락하면서 날아오르는 법을 배우는 새처럼
Go Forward Go, Go- Go Forward

후회로 가득했던 지난 밤은 잊어버리고
달리는 아이처럼
벅차오르는 심장을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만


음악듣기: https://youtu.be/FVQX1TrloWk

심규선 -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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