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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음악산책

산촌의 그 집에서는 근심이 없었네

정태춘, 박은옥 - 북한강에서 듣다가

by 고요한

도봉산 자락에는 조그마한 집 한 채가 있다. ‘근심이 없는 산촌의 집’이라는 의미의 무수산방(無愁山房)인데 대학생일 때 김OO 교수님의 초대로 가끔 놀러가고 했던 곳이다. 교수님은 봄, 가을이면 학생회, 광고학회 그리고 가고 싶은 학생들을 초대해 넉넉한 술과 고기로 멋진 식사를 제공하시고, 좋은 이야기를 곁들어주셨다.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여러 기억이 덧대이는만큼 한 장소를 단 하나의 감정으로만 기억하는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내가 도봉산에 좋은 추억만을 품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교수님과 무수산방 덕분이다.

무수산방에는 의식 같은 행사가 있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즈음 모닥불에 둘러앉아 자기소개 겸 한곡씩 노래를 부르는 일이었다. 서너 차례 무수산방을 방문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낯이 익은 교수님의 지인 분들도 생겼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광고회사 ‘컴OOO’의 한OO 대표님이다. 흔히 내가 떠올리던 광고인이라면 화려한 말빨로 주변을 정리해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별 말씀 없이 지긋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지긋이 웃음만 지으시던 한 대표님은 굉장히 특이한 분이구나 싶었다. 따로 연락을 드린 적도 없고 그 이후에는 무수산방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바람에 한 대표님과의 인연도 자연스레 멀어지고 말았다.

잊고 있던 한 대표님을 떠올린 건 며칠 전의 일이다. 즐겨듣는 라디오인 CBS <뉴스쇼>에 출연하셨기 때문이다. 출연 이유는 최순실 국정농단의 피해자로 사건전모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한 대표님이 운영하는 ‘컴OOO’가 포스코의 광고계열사인 ‘포레카’를 인수하려하자 포레카를 통해 미르-K스포츠 재단의 이권을 챙기려던 최순실 일당이 컴투게더가 포레카를 인수하지 못하도록 한 대표님을 협박했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뷰에서 한 대표님은 ‘묻어버리겠다’는 말을 듣고 심적 고통을 겪고, 아마도 윗선의 압박이 분명했을 경영상의 어려움까지 겹쳐 몸무게가 49kg까지 빠진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국가조폭집단’ 때문에 한 대표님이 겪으셨을 괴로움의 깊이를 감히 내가 상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사실 굉장히 송구스럽다. 멀리서나마 응원의 목소리가 전달되었으면...

유대인 수용소를 경험한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은 “악의 기억은 악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할 것이고, 죽음의 기억은 죽음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박근혜와 최순실 일당의 행동이 ‘국정농단’이라는 단어 하나로 치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시민들의 고통이 ‘국가의 정치(國政)‘라는 건조한 단어 아래에 묻을 수는 없다. 악한 무리들이 어떤 일들이 벌렸는지 철저히 기록하고 기억하며, 괴롭지만 시선을 돌리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여담으로 교수님이 한 대표님을 소개할 때 항상 말씀하시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무수산방과 비슷한 술자리였다고 말씀하신 것 같다. 한 대표님께서 정태춘과 박은옥의 ‘북한강에서’를 부르시다가 “북한강 보러가야겠다!”며 한밤중에 정말 북한강을 보러가셨다고 한다. 교수님께서는 엄지를 치켜들며 “한OO 대표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로맨티시스트입니다”라고 강조하셨던 모습이 기억난다. 부디 이번 일이 공정하게 마무리되어 산촌집 마당 한 켠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한 대표님의 ‘북한강에서‘를 근심없이 청해 듣는 날이 있기를.




1985년 발표한 <북한강에서>의 수록곡이다. 정태춘은 부인 박은옥과 함께 사회참여적인 포크계를 이끈 거물이며, 사전심의폐지운동 등을 주도해 가요계 역사를 바꾼 인물이다. 앨범소개에는 ‘시대의 저항 정신이었던 정태춘은 풍요롭고 감성적인 사운드와 시적인 가사로 좀 더 편안한 포크를 들려주고 있다’라고 쓰여있다. 최근에 오랜 잠적을 깨고 11월 12일 민중총궐기에 나와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열창했다.




정태춘, 박은옥 – 북한강에서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힌 먹구름이
밤새 당신머리를 짙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강에
홀로나와 그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이름과
또 당신이름과 그 텅빈거리를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개속으로 새벽강은 흐르고
나는 그강물에 여윈 내손을 담그고
산과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했소
강물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딫치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곁에 오래 머물때
우리 이젠 새벽강을 보러 떠나요
강으로 되돌아 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음악듣기: https://youtu.be/QYxyV2XC7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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