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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음악산책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여름

Yamasita Tatsuro - 夏への扉 듣다가

by 고요한

서교동의 카페에 앉아있다. ‘유명한 양’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추천 받았다. 오랜만에 힙스터의 성지에 왔으니 잔뜩 허세를 부려 과테말라 안티구아를 시켜봤다. 커알못이라 커피 맛은 모르겠고 내가 다녀본 카페 중에 테이블 간격이 가장 넓고 6500원에 드립커피를 리필까지 해주는 게 마음에 든다. 리필은 브라질 세하도로 부탁했다. 아직 내게 양놈구정물은 다 비슷하다.

따져보니 일주일만의 외출이다. 일주일 동안 뭘 했냐고 물어보면 글쎄. 허리가 아플 때까지 누워 있다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었다. 야구도 봤다. 삼성에게 털릴 줄이야. 기아의 여름이 걱정이다. V11은 올해가 아니면 힘들 것 같은데. 별 대단치 않은 글도 서너 개 썼다. 글감이 떠올랐다기보다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많았던 덕분이다.

봄에 무엇을 했나 기억을 더듬어도 봤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박스포장이다. 단순반복 업무는 기겁을 하는데 올봄에는 박스포장 하는 시간만 기다렸다. 팟빵을 켜서 <김현정의 뉴스쇼> 또는 <이진우의 손에 잡히는 경제>를 틀어놓고 아무런 생각 없이 가위로 뾱뾱이를 자르고 박스를 조립하고 박스테이프로 단단히 마무리하고 송장을 붙였다.

지난 몇 년간을 되돌아봤다. 박스포장 할 때처럼 아무 생각 없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불렀다지. 알만 여러 개 싸질러놨지 품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놓고 부화하길 기다리는 건 도둑놈 심보라며 반성했다. 물론 박스포장은 생계가 달린 일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휴식이자 망상이다.

카페에 들어온 지 1시간 30분이 지난 지금의 나도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다가 갑자기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당장 가장 큰 고민은 저녁에 무엇을 먹느냐다. 근거는 없지만 어쩐지 좋은 변화가 생길 것 같은 여름의 초입이다. 수더분한 메밀면이나 수제우동, 심심한 평양냉면이 어떨까. 세 가지를 한 번에 먹을 만큼은 위대하지 못한 나는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더니 손이 떨린다.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야겠다.



일본의 천재적인 싱어송라이터 야마시타 타츠로(Yamasita Tatsuro)가 1980년 발표한 [RIDE ON TIME]의 수록곡 ‘夏への扉 (The Door Into Summer)’이다. 힙한 동네 분위기에 어울리게 적당히 유명하면서도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의 음악을 골라봤다.

농담처럼 소개한 말인데 80년대 초반에 활동한 아시아 뮤지션의 음악이라고 믿기지 않게 본토 못지않은 그루브와 리듬감이 예술이다. 일본에서도 자타공인 천재뮤지션으로 불린다는데 인정 안하고 못 베기겠다. 버블시대의 일본은 볼수록 신기하다.

일주일 동안 틈틈이 야마시타 타츠로의 곡을 듣었는데 국내 스트리밍 사이트에서는 서비스되지 않아 유튜브만 방황 중이다. 저작권 문제 좀 빨리 해결해줬으면.


음악듣기: https://youtu.be/XOgaEChUv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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