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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음악산책

82년생 김지영을 괴롭히는 네안데르탈인

파 프롬 헤븐 OST - Autumn In Connecticut 듣다가

by 고요한

“진짜 여유 있는 사람들은 해외로 나가고 골프장으로 나간다. 일상에서 보인다는 것만으로 욕 먹는 게 안타깝다.”

친구가 팟캐스트에서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을 소개하며 내가 예전에 했다는 말을 인용했다. 내 입으로 뱉었다기에는 너무 그럴싸한 말인데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직 『82년생 김지영』을 읽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다. 아마 낮에 카페에 앉아있는 여성들을 보며 ‘남편은 직장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힘들게 돈 버는데 맘충들(싫어하는 표현이지만 맥락상 어울릴 거 같아서 쓴다)은 유모차 끌고 나와서 한가하게 수다나 떤다‘는 맥락인거 같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같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남들 일할 시간에 놀러 다니느라 한낮의 풍경을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 카페에 앉아있는 주부들을 자주 봤기 때문에 그들이 가사노동의 전부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동안은 가사/육아노동의 가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탓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무래도 상상력 부족이 더 큰 이유인듯하다.

편견이 깨진 건 또래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육아에 대한 고민을 실시간으로 카톡에 올리면서부터다. 힘겹다고 밖에 표현 못할 24시간 가사노동 중 잠깐의 시간을 쪼개서 비슷한 처지의 주부들과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게 내 친구들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후로는 내 일상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상상하는 습관을 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신체능력이 떨어지는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압도할 수 있던 이유로 ‘상상력’을 꼽았다. 네안데르탈은 150명 이상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직접 살을 맞대고 말을 섞는 사람만 공동체 구성원이라고 인정을 했는데 그 한계가 150명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평범한 사람이 관리할 수 있는 인맥의 한계는 150명이라고 한다.

반면 호모 사피엔스는 종교와 화폐처럼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가치를 상상할 수 있었다. 하나의 상징을 통해 권력이 생기고 계급이 만들어져 수백, 수천의 개인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엮일 수 있었다. 수천을 동원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와 150명 정예 네안데르탈의 대결 결과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가장 강력한 자연법칙은 ‘다굴에는 장사 없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카페에서 수다 떠는 주부들을 욕하는 것. 연휴에 공항에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며 힘들다는 게 다 거짓말이라고 단정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현대 사회가 피부색깔로 결정되는 다인종사회는 커녕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함께하는 다인류사회조차 극복하지 못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까. 호모 사피엔스가 되기 위해 아직 갈 길이 멀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2002년 작품 <파 프롬 헤븐(Far from Heaven)>의 OST 첫 번째 트랙. ‘Autumn in Connecticut’이다. 1950년대 코네티컷주의 중산층 백인가족. 특히 가정주부인 케이시(줄리안 무어)를 주인공으로 한 퀴어영화이며 동시에 인종차별 문제도 짚어나가고 있다. 고전미가 물씬 풍기는 고풍스럽고 차분한 연출 아래에서 급진적 상황을 겪으며 변해가는 캐릭터를 섬세하게 포착한 수작. 같은 감독의 작품인 <캐롤>의 원형이 얼핏얼핏 눈에 띄며 <아가씨>도 이 영화의 OST에서 꽤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음악듣기: https://youtu.be/aU6wl6TQTq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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