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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한 Jul 03. 2017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5)

나는 내 자신이 지겨워

2008년 7월 6일. 싸이월드 사진첩을 확인한 <비포 선라이즈>를 첫 관람일이다. 주인공들과 같은 23살에 남긴 길지 않은 감상평은 ‘유레일패스를 사면 AT필드를 깰 수 있는지 궁금하다’이다.

솔로였던 나는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같은 로맨스를 꿈꿨는데 아시아를 벗어난 적이 없고 솔로도 아니라 확인은 불가능할 것 같다.

또 하나 사실 확인이 어려운 건 <비포 선라이즈>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와 장면이다. 첫 감상에서 어떤 부분에 꽂혔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싸이월드 감수성에 어울리게 오글거리도록 적어놨다면 지금과 좋은 비교가 되었을 텐데 아쉽다.

어쨌거나 <비포 선라이즈>를 재관람한 건 공교롭게도 9년의 시간이 지나 <비포 선셋>에서 주인공들과 같은 나이가 된 2017년 7월 2일이다. 9년 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 미리 정리를 하자면 더욱 이야깃거리가 많은 건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다.

짧게 말할 수 있는 '가장 좋았던 장면'은 Kath Bloom의 Come here을 같이 듣던 음악 감상실이다. 2분 30초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사랑을 확인하기는 아직 불안함이 남아있던 제시와 셀린느의 긴장감과 머뭇거림. 설렘과 주저함이 완벽하게 영상으로 구현됐다. 유튜브에도 <비포 선라이즈> 명장면 리스트의 첫 번째에 오른 걸 보니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많은듯하다.

반면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다수의 취향과는 약간 엇나간 듯 보인다. 확실한 근거라기에는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지만 네이버 명대사 리스트에서는 제일 끄트머리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술집에서 와인을 구해 시민공원에 누워 제시가 셀린에게 했던 대사다.

“난 내 자신이 지겨워 그런데 너와 있으면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이미 사랑을 확인한 두 주인공의 감성을 표현하는데 주력한 후반부의 연출과 달리 온전히 제시 혼자만의 깨달음에 가깝다. 어떻게 보면 영화흐름과 동떨어진 이 대사에 꽂힌 이유는 작년에 들었던 ‘나를 타인처럼 바라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제시가 ‘내가 지겹다’고 말한 이유는 어떤 장소든 ‘나’를 벗어날 수 없는 탓이다. 밥을 먹어도 음악을 들어도 심지어 말 한 마디를 뱉는 순간에도 나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그렇게 나와는 어쩔 수 없이 평생을 함께 해야 한다.

문제는 제시처럼 지루한 나. 즐겁지 않은 나. 더 나아가 불행한 나와 함께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불행한 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떨 때 행복하지 않은지 알아야 하는데 나를 타인처럼 바라보는 습관이 없다면 이 순간을 벗어나기는 힘들다. 당연하게도 불행한 내가 다른 사람과 행복한 관계를 맺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아마도 제시는 평소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운명적인 사랑을 믿지 않는 그에게는 셀린느를 기다린 6개월 혹은 그 이상의 시간도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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