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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카피 May 19. 2023

036. 너는 설레고 나는 긴장했던 날

아이의 첫 소풍 엄마의 첫 도시락



요알못이다. 아이도 그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냉장고에는 양가 할머니들의 반찬이 가득 차있다. 떡국은 창동할머니가 만든 게 제일 맛있고 미역국은 양평 할머니가 만든 게 최고다.

그런 우리에게 결전의 날이 왔다. 바로 봄소풍. 이건 피할 수 없다. 새벽에 할머니들을 소환할 수도 없고 오롯이 엄마인 나 혼자 해결해야 하는 미션인 것이다. 꼴에 욕심은 나서 캐릭터 도시락을 만들겠다고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일단 아이에게는 비밀로 하고.


전날 야심 차게 장을 봤다. 날이 더울 거라 예상되기 때문에 시금치, 치즈 이런 건 모두 패스했다. 최대한 심플하면서도 최대한 효과를 뽑아내야 했다. 비주얼로 가장 좋은 건 문어소시지. 이건 불변이다. 그리고 기본은 김밥. 그리고 장식하기 좋은 포도와 샌드위치. 이걸 어떻게 배치하고 데코 하느냐에 따라 도시락의 퀄리티가 달라진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머리로만 되뇌어왔다. 오늘 아침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막상 눈앞에 김과 단무지와 밥들이 펼쳐져 있고 소시지라 탱글탱글 굴러다니기 시작하자 요리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걸 절실히 느꼈다. 김밥 안에 들어가는 밥이 왜 꼬슬꼬슬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문어 소시지는 말이 문어지 칼집 넣는 게 만만치 않았다. 잘못하면 박살 소시지가 될 판이었다. 그래도 차분하게 할 수 있는 걸 해나가기 시작헀다. 머릿속에는 계란지단으로 만든 귀여운 병아리도 있었지만 패스했다. 할 수 있는 걸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건 하나씩 지워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다 싸놓고 보니 도시락통 사이즈는 왠지 작게 느껴지고 생각헀던 것들은 다 넣지 못했다. 문어 소시지도 세 마리가 간신이 끼여 들어갔다. 정말 보통의 누구나 쌀 수 있는 도시락이 되었다. 아이디어를 쥐어짜서 도시락 뚜껑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티니핑 캐릭터와 헬로카봇 캐릭터를 붙인 건 다행이었다. 엄마의 사랑해 메시지를 써 붙인 것도. 

그렇게 허둥지둥 도시락을 싸서 아이 가방에 넣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신이 나서 유치원 버스를 타고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니 안도가 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소풍 장소에서 다른 친구들과 도시락을 열었을 때 아이는 기뻐할까 아니면 실망할까. 제발 제발. 


그날 오후 4시. 나의 두근거림은 긴장이었고 아이의 두근거림은 설렘이었다. 나를 보고 뛰어오는 아이가 이렇게 외쳤다.

"엄마! 도시락 나 싹싹 다 먹었어! 진짜 맛있었어!"


이런 뭉클한 감정이 엄마의 특권이란 걸,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어서 이렇게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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