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복순은 페미 영화일까? 페미 영화는 가부장제 사회구조와 성차별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여성의 경험을 통해 나타내는 서사구조와 재현방식을 가진다. 이 기준에서 페미범벅이라고 ‘한남들’에게 별점 테러를 당하고 있는 길복순이 진짜 테러를 당할 만한 ‘페미’ 영화인지 가려본다.
길복순은 여자 주인공이다. 그럼, 페미? 박근혜 대통령은 페미였나?
길복순은 여성 킬러다. 대부분 킬러는 남자인데... 그럼 페미니스트 적인가? 엄청나게 흥행한 할리우드 영화 ‘블랙 위도우’도 있고 고전 대작 뤽배송의 ‘니키타’도 있고. 한국영화 중에는 김옥빈 주연의 ‘악녀’도 있고 ‘마녀 1, 2’도 있다(마녀는 생체실험자로 ‘초젠더’적 인물이긴 하지만). 여성 ‘킬러’라는 점만으로는 여성주의 의식을 고양하기 부족하다. 대표적 킬러 영화, ‘레옹’이나 ‘존윅’이 힘 있는 남성 서사와 캐릭터의 굵직 한 남성성을 보여줬다면 여기 비견해서 길복순은 ‘여성’ 킬러로서 무엇을 보여 줬나? 남자보다 실력 좋은 여자? 복순은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야쿠자 두목에도 비빌만큼 사람 잘 죽이는, 성공률 100%를 자랑하는 수준급 킬러이다. 오, 여자가! 그럴듯한데.. 가 아니다. 여성주의는 젠더 역할 바꾸기가 아니다. 남자가 하는 힘센 거, 사람 죽이는 거, 여자도 해. 이건 그냥 미러링일 뿐.
복순은 애 있는 여자 킬러다. 영화는 모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엄마로서 자식을 키우는 게 힘들다고 보여주면 페미니스트일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아들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토로하는 흔한 아침드라마는 성차별 구조를 비판하고 있나? 오히려 아들을 가진 여자(시어머니)가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위치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는 건 아니고? 그래도, 킬러로서 모성을 가진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는 것은 흥미로운 설정이다.
‘참 모순이야 이런 일 하면서 엄마라는 게’ 복순의 보스, 설경구(극 중 차민규)의 입을 통해 감독은 사람을 죽이는 킬러의 잔인함과 모든 생명 품는 모성의 아이러니한 부조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복순은 엄마 역할에 대해서만진지하면서도치열하고 애절하게 고민한다.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해. 애 키우는 거에 비하면”
복순의 이 대사는 그녀가 킬러보다 엄마 역할에 자기 정체성을 더 부여하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모두 사회에서 한 역할만 부여받지 않는다. 똑같은 사람인데 직장에서는 오지라퍼 대리님, 집에 오면 말 안 하는 까칠한 아들, 교회 가면 순둥 한 집사님 등 여러 역할을 동시에 한다. 멀티 캐릭터에서 유독 한 캐릭터에 대한 고민은 그 역할을 자기 자신과 가장 동일시하며, 수행하기 어렵다는 의미도 된다.
복순은 애 키우는 게 어려운 엄마다. 양육이 쉬운 사람은 없다. 더욱이 엄마로서 사춘기 딸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감정 돌봄은 더욱 어렵다. 엄마가 경력직인 사람은 거의 없다. 순차적으로 몇 명의 아이를 낳고 돌보아서 경력직이 되기에 난자의 생존기간은 짧다. 거기에 가부장적 가족과 사회 덕택에 양육도 어렵다. 그렇다고 엄마 되기 학원을 속성으로 다녀 필요한 전문지식을 쏙쏙 골라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성’에 ‘배움’은 없다는 게 사회통념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아기주머니, 자궁이 있다는 이유로 엄마 되기를 기대받고 이 타고난 모성으로 ‘엄마’ 역할이 주어진다. '엄마가 그것도 몰라?', ‘엄마가 그 정도는 해야지’, ‘엄만데’등등 복순도 모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에 부흥하려 스스로 노력한다. ‘내가 그래도 엄마인데 딸에 대해서 너무 몰랐어’ 하며 스스로 모성을 성찰하는 모습. 이에 반대로, ‘엄마면 다 알아야 하는 거야?, 엄마도 힘들어’ 하며 사회적으로 구성된 규범적 모성에 문제제기 하는 모습. 이런 모순적 ‘모성’을 수행하는 킬러 복순의 어렵게 애 키우는 이야기까지는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고 구성된 모성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페미영화의 밑밥으로는 꽤 성공적이다.
비판적 모성 크리틱에 ‘내 딸은 나처럼 살게 하지 않을 거야’라는 복순의 대사는 모든 엄마들의 바람을 대변한다. 이 대사는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페미니즘 명제의 변주이다. 복순의 바람대로 복순의 성을 이어받고 킬러의 유전자까지 물려받은 딸 길재영은 엄마처럼 살지 않을까? 자길 괴롭혔던 남학생을 가위로 찔렀으나 ‘죽이려 한건 아니야’라는 딸의 진언처럼 복순에 뒤를 이어 킬러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자궁을 가졌으니 애를 가져야 해. 엄마가 돼야지’.라는 사회의 정상성 기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이를 낳은 여자가 모성으로 자식을 잘 양육해야 하는 여성의 삶의 조건과 성역할 수행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변성현 감독은 이 규범적 여성성 수행에 관한 태클로 딸 길재영을 타고난 레즈비언으로 설정한다. 이성애적 섹슈얼리티 관계에서 여성성은 남성성의 타자로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여성이 여성을 이異성으로 생각한다면 기존의 젠더 관계에서 자유롭지 않을까,라는 게 감독의 의도이다. 물론 레즈비언은 성적관계나 연애관계 내에서 기존의 여자가 수행한 여자 역할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동성애 관계를 추궁하며, ‘누가 여자역할이고, 누가 남자역할이야?,라고 묻는 남학생의 질문에 콧방귀를 뀌며 무시해 버리는 15살 딸 길재영처럼 말이다.
성적 취향 sexual orientation이 모든 젠더 수행의 전부가 아니지만,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적지는 남성이 없는 레즈비어니즘도 아니지만, 70년대 미국 여성운동에서 분리주의로 비판받았던 레즈비어니즘의 한계를 보았지만, 길재영은 길복순처럼 모성으로 대변되는 여성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담보해 살지는 않을 것이다. 레즈비언이어도 애가 있다면 모성을 배우게 되긴 하겠지만. 그 모성은 이성애를 지향하는 여성과는 다를 수 있음으로. 길재영의 레즈비언니즘으로 길복순의 진부한 모성을 변주한 영화 길복순은 어느 정도 이 시대의 여성성을 크릭티컬 하게 재현해 냈다.그래...서. 한남들한테 까일 만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