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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심원이다!!

국민참여재판 배심원 후보 발탁

by TiNG

법원에서 등기가 왔다.

뭘까? 뭐지? 뭘 잘못한 게 있나? 3년 전 길에서 5천 원 주은 거? 새벽에 몰래 무단 횡단한 거? 식당에서 술잔 깨 먹은 거? 세금도 다 내었고, 나름 법대로 잘 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법원 등기가 오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고, 자아를 성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워내기를 하며 숨을 고르고, 등기 우편을 뜯어보았다.

배심원안내서.jpg 아이 깜딱이야


귀하를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으로 초대합니다.


뭐? 배심원? 법원? 나 재판받아? 뭐 잘못했어? 돈 빌려주고 못 받은 거? 동생 발로 찬 거? 개미 죽인 거? 또다시 자아성찰의 시간에 올라타려던 찰나, 다시 보니 "초대"한다는 문구가 보였다. 일단 아니다. 내가 잘못한 거 아니다. 안도감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우편을 뜯어보니 무슨 안내장과 신청서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뭘까. 뭐지? 뭘 신청하고 뭘 초대받은 거지? 찬찬히 보니 국민참여재판이 있을 건데, 그 재판의 배심원으로써 초대한다는 것이었다. 말로만 듣던 배심원? 내게 그런 행운이? 오예~ 자세히 보니 100여 명의 후보를 무작위로 추첨해서 불러놓고, 재판장에서 실제 배심원을 면접으로 8명가량 뽑는 것이었다. 배심원은 아직 아니고 후보로 발탁된 것이었다. 게다가 초대에 불응하면 200만 원 과태료가 있다고 한다. 그래도 배심원 후보라니, 일말의 우쭐 감에 안내책자를 보니, 재판이 열리는 관할 구에서 무작위로 발송을 한다고 한다. 전혀 선택받은 게 아니라, 단지 랜덤이었을 뿐이었다. 잠시 실망.


군대나 출장, 입원 같은 사유가 아니면 무조건 참석해야 하는 거라 일단 참석 신청서를 보냈다. 재판이 있기 3개월 전이고, 코로나 걸리기 1달 전이었다. 에잇... 코로나 ㅜㅜ 죽어 너 코로나..


KakaoTalk_20220708_165241144.jpg 철망 뭐야 ㅋㅋㅋ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고, 회사 복귀해서 일과 사투를 벌이고, 밤마다 PC게임에 사투를 벌이다 보니 어느덧 법원에 가는 날이 되었다. 회사에는 사정 설명하고 공가를 받고 아침 9시 반까지 법원으로 향했다.

법원에 들어가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서너 번째로 간 거 같다. 남녀노소 골고루 모여 100여 명이 되었을 때, 이름 대신 불릴 번호표를 받았다.

69

KakaoTalk_20220708_165241144_02.jpg 뒤집어도 우영우 아니 69

뒤집어도 69, 똑바로 봐도 69번을 받아 들고 재판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 떨려. 무서워서 내부 사진은 못 찍었다. 어떤 나보다 젊은 여성분이 사진 막 찍을 때 같이 찍을걸.... 엄청 후회가 몰려왔다. 이건 정말 브런치 감인데... 하면서.

TV를 통해 흘러나오는 안내사항을 보고 있자니, 배심원 후보들이 모두 들어와 방청객석에 앉았고, 앞에 판사와 우배석 좌배석 판사 그리고 피고 측 변호사와 원고 측 검사가 들어왔다. 팽팽한 긴장감. 다들 개미 소리 하나 안 내고 침만 삼키고 있었다.


이윽고 판사님이 배심원 취지와 절차를 설명하고는 배심원 후보 8명을 뽑았다. 추첨함에 들어 있는 번호 적힌 탁구공을 꺼내는 아날로그 방식이었다. 10번, 92번,,, 나랑 비슷하게 도착했던 사람들이 앞, 뒤 번호를 가지고 호명되어 앞으로 나가 배심원석에 앉았다. 이런, 난 꽝인가? 아니다. 먼저 호명된 사람들에게 검사와 변호사가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이에 응답을 한다. 이는 검사와 변호사가 자신의 주장에 호응을 할 만한 사람을 추려내는 절차였다. 그렇게 불려 나간 8명 중 4명이 탈락해서 자리로 돌아왔다. 질문은 대략 대여섯 개였던 거 같다.


다시 4명이 충원되고 다시 질문이 오가고, 3명이 탈락, 다시 충원, 1명 탈락, 다시 충원이 진행되면서 괜히 모를 기대감은 점점 절망감과 아까운 내 시간...이라는 분노가 쌓여갈 때 즈음, 존경하는 판사님께서, 탈락되어도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다.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뽑기운이 없어서인 거라고. 게다가 일당도 지급이 된다고 하셨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의 없습니다! 존경합니다!

물론 배심원으로 활동하면 10만 원의 일당이, 후보로 왔다가 돌아가면 6만 원의 일당이 입금된다. 2달 걸린 거 같다. 잊었는데 주시다니, 또다시 존경하는 재판장님 만세!!

사실 배심원이 되면 재판을 끝까지 다 봐야 하고, 밤늦게까지 배심원끼리 협의해서 결론을 내야 하는 등 힘든 고난의 시간이 기다리는 거라, 차라리 안된 게 더 낫다는 말도 있었다.


여하튼 배심원은 다 정해졌고, 돌아가는 길에 빈 손으로 보낼 수는 없었는지, 법원 굿즈를 나눠줬다. 마스크 걸이 하고 그립톡 ㅋㅋㅋ '나는 배심원이다' ㅋㅋㅋ 실은 나는 배심원(후보)이다. 배심원이 되면 좀 더 많은 굿즈를 준다고 인터넷에서 봤다. 노트랑 컵이랑 뭐 그런 거.

KakaoTalk_20220708_165241144_01.jpg 사진이 옆으로 안 돌아가네


암튼 해당 사건은 배달원과 초고층건물 보안요원 간의 폭력사건이었고, 누가 이겼는지는 모른다. 다만 내가 배심원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인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경험. 좋은 경험이었다. 그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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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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