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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광머리 앤 Feb 10. 2017

밤벚꽃의 추억

83년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 신입생으로 몇 달째 생리도 끊겨 있었다.

매일 지하철 맨 뒤칸 옴폭 들어간 곳에서 엄마가 보고 싶어 훌쩍거렸다.

하루 종일 아시아에서 제일 넓다는 캠퍼스를 돌아다녀도 

아는 친구 하나 만날 수 없었다.


학교엔 남학생이 왜 그렇게나 많은지

4학년 때부터 여자반, 여중에 여고를 나와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학생식당에서 혼자 점심 먹을 배짱도 없었고

한잔에 백 원씩 하던 콜라 한잔도 어디서 파는지, 

뭐라고 말하면서 달라고 해야 하는지

몰라서 못.먹.었.다.


그러다가 딱 이때쯤이다.

뭔 용기가 났는지 419마라톤을 뛰어보려고 거금 만원을 들고 학교에 왔다.

마침 버스표도 다 떨어지고 해서

만원으로 419마라톤 등록도 하고 버스표도 사려고 

현대의 사회학 책 사이에 끼워놓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도서관 1층 기본 도서실 속칭 기도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다른 수업에 들어가면서 책을 펼쳐놓고 나갔다.


수업하다가 책갈피가 펄럭이다 만원이 노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현대의 사회학이 당시로선 아주 고가에 속하는 만원이 넘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돌아가 보니 누가 책을 통째로 들고 가 버렸다.

점심 먹을 돈은 물론 없고 419마라톤도 등록 못하고

돌아갈 차비도 없었다. 


간호학과에 다니는 기숙사에 사는 

고등학교 친구한테 산을 하나 넘어 찾아갔더니

그 친구도 돈이 없다고(그래 너나 나나 무슨 돈이 있었겠냐)

기숙사 한층을 돌아다니며 달랑 버스표 한 장을 구해다 줬다.


내가 학교 다니던 이모네 집은 95번 버스를 타고 노량진까지 가서

노량진에서 1호선을 타고 청량리까지 가야 하는데 버스표 한 장만 있지

지하철은 탈 수 없었다. 아까 그 잃어버린 돈 만원으로 

한 달에 오천 원하는 지하철 패스를 끊어야 했다.


하지만 95번을 타면 두 시간을 돌아 돌아 

경동시장까지 가기 때문에 경동시장에서

이모네 집까지 좀 멀어도 걸어가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95번을 타고 자다 깨다 하며

 두 시간을 버스에 앉아 있는데

깜빡 졸다 눈을 떠보니 날은 저물어 있고 

내 눈앞엔 달빛에 환히 빛나는

벚꽃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있었다.


 창경궁 담 옆이었다.

당시만 해도 창경궁 밤 벚꽃놀이가 대단했다. 

차가 밀려 한참 밤 벚꽃을 쳐다보는 호사를 누렸다.


나는 꽃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밤에도 꽃이 환하게 빛나는지 처음 알았다.

그 꽃이 그렇게 강렬했던 건 잃어버린 돈, 잃어버린 책,  암담한 현실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여름방학이 되고 집으로 돌아가 다시 생리를 시작하고

그 이후 삼십 년을 살면서 그보다 더한 어려움도 겪었지만

그 어려움이 지금도 끝나지는 않았지만


벚꽃이 필 때면 

그 스무 살 청춘 어리바리한 나와 달빛에 빛나던

벚꽃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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