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무슨 성격검사를 했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나한테 친절해졌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성격검사에서 요주의 인물로 나와서 그런 것 같았다. 왜냐하면 사려성이 99이고 충동성이 98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상반된 성향이 극단적으로 높아서 선생님이 쟤가 이상한 앤가 싶었던 것 같다.
여행할 때, 혹은 살아갈 때 나는 무지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고서 결정할 때는 충동적으로 해버린다. 신혼초 임신했을 때, 삼십몇 년 만에 오는 무더위에 에어컨을 사기로 했다. 에어컨의 종류, 값, 우리 집에 맞는 에어컨을 열심히 공부해서 찾았다. 막상 사러 가서는 직원의 말에 혹해 다른 걸(예상액의 3배에 달하는) 턱 사 왔다. 충동적으로 결정하고는 그 뒷감당을 하는 게 나의 삶이다. 그러면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는데 또 다음에도 그렇게 결정한다.
이렇게 충동적인 내가 더 충동적인 사람을 이태리 여행에서 만났다. 이 충동 아줌마는 아침에 오늘 일정과 갈 길을 분명히 회의로 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트램을 보면 갑자기 타자고 한다. 저기가 좋아 보인다며 저리로 가자 한다.
사실 충동 아줌마가 이렇게 결정을 바꿀 때마다 내 안의 작은 나도 그 결정에 찬성한다. 그러나 내 안에 존재하는 사려 깊은 나는 그 충동적인 결정 후에 올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계산하고 그걸 막는다. 내 안의 작은 내가 그 결정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없는데 내 안의 어떤 나는 그 아줌마의 결정을 따르고 싶다는 게 문제다(도대체 내 안엔 얼마나 많은 내가 존재하는가?).
밀라노에서 슈퍼마켓을 찾아 나섰다. 어둑어둑 해 질 녘이었고 어제 거기에 도착했기 때문에 거기 지리는 잘 몰랐다. 지나가는 아줌마에게 슈퍼를 물어봤더니 이 근처엔 없다고 자기 차를 타란다. 그러면서 차 뒤에 있는 애들 용품을 막 치운다. 우리는 냉큼 그 차를 탔다.
고맙기도 하지. 그러면서 차를 타고 가는데 점점 멀어진다. 우리는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 이 생각을 하는 건 사려 깊은 나고, 내 맘속의 충동적 나와 그 충동 아줌마는 이 예기치 않은 모험에 신나서 그 이태리 아줌마에게 고맙다고 난리를 친다. 그래 고맙긴 고맙지.
슈퍼에서 식재료를 사고(이것도 원래 정한 메뉴와 관계없이 거기에 있는 걸 보고 충동적으로 많이 산다) 돌아가는데 해가 뉘엿뉘엿 졌다. 모르는 동네고 여기가 혹시 무서운 동네일지도 모르고 큰길로 가자는데 굳이 동네 작은 길로 가잔다. 중간에 철길이 있어 지도상 보는 것과 가는 길이 다를 수도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뒷일을 걱정하는 것은 내 몫이 되었다. 평소의 나라면 내면적 충동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보다 더 강력한 충동을 가진 아줌마 앞에서 나는 내 안의 반대 성향을 발현시킬 수밖에 없었다. 트램이 보이면 지하철역으로 가다가도 트램을 타고, 이리 가다가도 저기 교회가 멋있어 보이면 그리로 가는 충동 아줌마 뒤에서 이 트램이 목적지가 어디이며 이후 일정 조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내 몫이 되어버린다.
이러다 보니 나는 스트레스가 쌓인다. 내 식대로 여행을 즐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밀라노에서 마지막 날 또 트램을 타자고 우기는 충동 아줌마랑 크게 부딪히고 각자 헤어져서 돌아다니다가 숙소에서 만났다.
아마 내가 다른 집단에서 상대적으로 충동성이 강한 사람이었다면 이 충동 아줌마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 짐을 지는 다른 사람이 존재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 역학이다.
그러니까 내 안의 어떤 요소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더 커질 수도 있고, 더 작아질 수 도 있다. 내가 이 집단에서 이 역할을 담당할지라도, 다른 집단에서 나보다 상대적으로 어떤 측면이 더한 사람을 만나면 반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소비적인 인간인데 남편이 더 하면 나의 소비성을 버리고 반대 속성을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근데 그게 내 생래적인 속성과 다르면 스트레스받게 되는 거다. 왜냐하면 부부관계가 하나의 단위가 되고 그 안에서 밸런스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