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펜 Mar 13. 2018

그래서 나도 나쁜 페미니스트다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고

나쁜 페미니스트 - 록산 게이


1. 나는 페미니스트다


아직도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나서 느꼈던 나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부끄러움을 잊을 수가 없다. 나 자신을 깨어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던 근거 자체가 오히려 성차별적인 관념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 그동안 얼마나 편협한 시야와 사고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난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그동안 오만했던 나 자신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성차별적인 사고방식과 과거의 행실들을 끄집어내어 똑바로 바라봐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었다. 지금도 나도 모르게 드는 성차별적인 생각과 배어 나오는 언행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직도 남성 중심적인 시야에 갇혀있고 실상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런 내게 ‘나쁜 페미니스트’는 한 번 더 나를 허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흑인 여성인) 저자의 시선을 통해 각종 문화매체, 언론, 사회에서 당연하게 그려지고 받아들여졌던, 그리고 문제의식을 느끼지도 못했던 왜곡된 여성상과 인종차별 문제들을 마주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가 색안경을 쓰고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인지한 실상으로부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실상이 너무나 열악하고 처참하여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문제였는지, 어떻게 바로잡아나갈 수 있을지 헤아릴 수 없음에 답답해졌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답은 간단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임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성차별적인 관념에 사로잡혀있는 나 자신을 인정하고, 그런 나를 부수고 허무는 것이어야 한다. 까만 색안경을 끼고서 이 세상의 다양한 색깔들을 온전히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물론 태생이 남자이기에 여성이 겪는 모든 문제에 대해 100% 피부로 느끼고 경험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 범위와 수준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엄마와 (미래의) 아내, 딸 그리고 친구들과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 그들이 바라보고 느끼는 세상을 경험할 수 없다. 그들의 안전과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성평등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기반을 닦을 수 없다. 나는 성평등 사회, 남녀 모두의 안전과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를 꿈꾼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다. 그리고 진실한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 



2. 프레임에 갇히다


우리는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그리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남성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거부반응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기득권층이 씌운 프레임에 갇혀 제대로 된 의미의 페미니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각종 복지정책을 옹호하고 통일을 지지하면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공산주의자로 매도해버리는 정치판을 떠올리면 쉽다. 그러한 ‘프레임 씌우기’가 젠더 이슈에 있어서도 기득권층에 의해 만연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눈뜬 장님이 되어버린 것이다. 페미니즘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많은 분야에서 여성의 권리가 남성의 것보다 낮으니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켜 성평등을 이루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매우 다양하고 각자가 추구하는 정도와 방법이 다양하다. 하지만 기득권층은 이분법적 논리와 일반화를 활용해 페미니스트들을 매도해버린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전투적이고 정치적이며 인간으로서 완벽하고 남자를 증오하고 유머가 없는 사람들’로 일반화하여 사람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또한 여성의 권리 신장은 곧 남성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라는 이분법 프레임을 씌워버려 상호 간에 적대적인 감정을 품도록 했다. 

얼마 전, 이 프레임 문제를 증명하고 한국 사회가 얼마나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인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었다. 가수 손나은 씨가 SNS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휴대폰 케이스에 ‘GIRS CAN DO ANYTHING’라는 문구가 적혀있었고 이를 보고 페미니스트가 아니냐며 일부 네티즌들이 추궁하기 시작했다. (+사진에 나타난 담배에 대해서도) 급기야 손나은 씨는 휴대폰 케이스가 페미니즘 굿즈가 아닌 협찬받은 물품이라고 해명했고, 담배는 스태프의 것이라 해명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논란이 되었던 문구는 말 그대로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이게 도대체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가. 여자는 뭐든 하면 안 되는 존재인 건가. 남자 연예인의 휴대폰 케이스에 ‘BOYS CAN DO ANYTHING’이라고 적혀있다면 과연 논란이 되었을까? 페미니스트면 또 어떠한가. ‘자신의 권리를 찾고 성평등을 이루어 내자’라는 관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추궁을 당하고 해명을 해야 하는 일인가? 담배를 피우면 또 어떠한가? 참…. 안타깝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페미니스트’ 임을 자처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이 사회가 남성 중심적이고 폭력적인 프레임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3. “여자는 나이가 무기야”


이 프레임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이미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성차별적인 프레임이 되어버렸다. 대학생 시절, 여자인 동기와 선배가 취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선배, 저 취업할 수 있을까요? 너무 걱정돼요.”

“괜찮아 너 어리잖아? 여자는 나이가 무기야. 그리고 혹시 취업 못해도 시집 잘 가면 돼” 


그때 당시에는 정말 부끄럽게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흘려들은 말들이었다. 그리고 이제와서야 이 사회에서 여성들이 설 자리가 얼마나 좁은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화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여성들은 스스로 자신의 나이가 무기라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왜 경제적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고 ‘시집이나 가야지’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일까? 이는 생각보다 많은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기업들은 취업시장에서 나이 어린 여자들을 선호한다. 그 이유는 20대 후반, 30대 초반이 되면 여직원들은 결혼을 할 것이고 임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기를 낳으면 십중팔구 회사를 관두게 될 것이다. 따라서 기업 입장에선 여직원보다 남직원을 채용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남직원들은 결혼하고 배우자가 아기를 낳아도 계속 회사를 다닐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같은 여직원을 뽑더라도 최대한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노동력인 어린 여직원을 뽑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이 '일.반.적' 현상을 통해 나는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이 사회의 성차별적인 관념과 문제점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1) 여자들은 아기를 낳는 순간, 타의에 의해 경제주체로써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임신과 육아로 인해 자리를 비우는 것에 대해 직장으로부터 많은 억압과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다. 당장 그 일을 다른 사람들이 떠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같은 여성으로부터도 눈치를 보게 된다. 임신과 육아는 태초, 아니 이 세상이 존재하면서 있던 현상인데 기업은 이 당연한 자연현상을 고려하지 않고 인사 시스템과 편제를 구성하여 가장 축복받을 행사를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야기시키는 무책임한 행위쯤으로 비치게 만들어버렸다. 기업이라는 조직을 만들 때 애초에 여자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가정했던 것일까. 

(2) 누군가가 육아를 위해 직장을 관둬야 한다면, 대부분 여성이 그만둔다. 첫 번째로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고 여기는 성차별적인 관념이 팽배해있다. 두 번째로 육아가 공동의 몫이라는 합의가 있다고 해도, 경제적인 요건을 고려했을 때, 앞으로 직장 내에서의 생존 및 승진 가능성, 소득에 대해 종합적으로 따져봤을 때, 남자가 일을 하고 여자가 육아를 맡는 것이 유리한 성차별적인 구조가 이미 뿌리 깊게 박혀있다. 비교하고 선택할 수 있는 기본 환경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3) 여성과 남성의 육아휴직을 보장하지 않는 사회이다. 여성과 남성이 당연하게도 육아휴직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기업 입장에서 직원을 채용하고 사용 기간을 따질 때 성별이나 나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전제하에선 누굴 채용하든 똑같이 일정 기간 동안 유휴인력이 될 것이기에) 여성과 남성에게 똑같은 육아휴직기간을 제공해야 한다. 육아는 공동의 몫이다. 여성이 먼저 육아휴직을 사용하여 신체를 회복하고 육아를 책임졌다면, 바통 터치하여 남자가 육아를 맡고 여성이 다시 직장(사회)으로 돌아가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 남녀가 동일한 시간과 환경을 보장 받음으로써 가정과 직장, 사회 사이에서 서로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4) 여성은 애초에 시집을 가는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가 여성을 ‘단순히 가사를 책임지고 배우자를 내조하는 역할’만 수행하도록 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역사가 너무 오래되어 여성 스스로도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한계를 그어버리게 되었다. 여기에 겉으로만 남녀평등을 표방하면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면서 여자가 스스로를 낮추고 ‘시집이나 가야지’라고 말하며 경제적 주체로써의 활동을 아예 포기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외에도 셀 수 없이 많다. 직장에서 같은 위치에 올라가도 여자는 ‘독한 사람’이 되고, 남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 ‘여교사는 1등 신붓감’이라는 말도, 여교사는 돈도 벌면서 시간도 많으니 (남성 중심적 관점에서) 본래 여성의 역할인 육아도 책임질 수 있다(책임져야 한다)는 성차별적인 관념이 기저에 깔려있다. ‘현모양처’라는 허울 좋은 말로 여성의 다양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낯짝이다. 지극히 성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이지만, 긴 역사 동안 반복되어온 기득권층의 프레임 작업과 잘못 자리 잡은 여러 관습으로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할 사회가 되어버렸다. 뉴스에 나오는 성범죄의 피해자가 내 어머니와 아내, 딸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토록 혐오한다고 말하고 억압하는 대상이 내 가족이고 친구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여성’과 ‘내 어머니와 아내, 딸’을 별개의 존재로 분리해서 생각해버리는 유체이탈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4. 특권을 인정하는 것, 문제의 본질에 다가서는 것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프레임의 늪에서 벗어나 실상을 직시할 수 있을까. 서두에서 말했듯, 그리고 저자도 말했듯, 그 시작은 결국 내가 가진 특권을 인정하고 지난날의 자신에 대해서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의 특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당장 일어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니 걱정은 붙들어 매라. 그에 대해 미안해하고 사과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당신 특권의 범위와 영향력을 이해하고 당신이 전혀 감도 못 잡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고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 인식하고 있으면 된다. 그들은 당신이 눈곱만큼도 모르는, 한 번도 겪지 않고 겪을 필요 없는 상황을 하루하루 견디고 있다.” 

- 나쁜 페미니스트 中


문제를 바로잡으려면 너무나 당연히도, 그것이 문제였다는 것부터 자각해야 한다. 틀렸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오답노트를 작성하고 다음 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문제에서도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그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여전히 억압받고 피해받도록 방치하게 될 것이다. 물론,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취업에 성공한 이유 중 ‘남자여서’라는 부분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면, 자신이 취업하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이 폄하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그 노력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동일한 노력을 하고서도 납득하지 못할 엉뚱한 이유(여성이라는 이유)로 취업시장에서 불이익을 받는 여성들의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 여성이 내 딸이라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내 어머니가 똑같은 일을 하는데 더 적은 임금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내 아내가 출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회사 눈치를 보느라 법적으로 보장된 휴가를 다 쓰지도 못하고 출근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여성전용주차장에 대한 논란에 대해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남성 중심적 프레임에 갇힌 사람은 ‘이런 공간이 왜 있지? 장애인 주차공간이나 넓힐 것이지, 운전 연습을 하면 되잖아, 이러니까 여자들은 안 된다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프레임에서 벗어난 상태라면, 해당 문제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그 공간의 정식 명칭은 ‘여성전용주차장’이 아니라 ‘여성우선주차장’이다. ‘여성이 운전을 못하니 배려하자’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공간으로 오해하고, 이에 대해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 이 공간의 정확한 목적은 ‘범죄예방’과 ‘임산부 보호’이다. 어둡고 밀폐된 주차장이 여성 대상 범죄의 장소로 쓰이니 범죄를 예방하고, 비좁은 일반 주차공간보다 넓은 공간을 확보하여 임산부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인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밝은 위치, 출입구나 주차장 관리원과 가까운 위치, CCTV가 있고 통행 인원이 빈번한 위치 등에 설치되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다. 

그런데 여성우선주차장을 보며 여성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을까? 주차장이 여성 대상의 범죄 장소로 사용된다는 맥락이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알아보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했을까? 만약 여성우선주차장을 반대하고 여성을 비난하는 이유가 ‘설치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는데 엉뚱한 곳에 불필요하게 조성되어 있다거나, 백화점 한 층 전체가 여성우선주차장이었는데 텅텅 비어있었다’라는 것이었다면, 그것 또한 틀렸다. 법의 취지와 기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해당 공간을 만든 것은 여성의 잘못이 아니라 해당 공간의 관리자의 잘못이다. 백화점 한 층 전체가 여성우선주차장인 것은 조금만 찾아보면 제도의 본래 취지가 아닌 백화점 마케팅의 일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판해야 할 대상이 잘못된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언제나 그래 왔듯, 욕하고 매도하기 쉬운 여성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여성은 감정적이다, 비이성적이다’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일반화하지만, 정작 그런 여성을 욕하는 많은 사람들이 훨씬 더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다. 

이와 같이 특권을 인정하고 두 눈을 가려왔던 프레임을 벗어버리면 하나둘씩 사회 곳곳에 퍼져있는 성차별적인 관념과 언행, 모습들을 직시할 수 있다. 치우친 사고의 방향을 바로잡고 여러 젠더 이슈들에 대해 상대방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 다양하고 넓은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공감하는 힘을 기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개인이 늘어날수록, 기득권이 움켜쥔 특권을 내려놓을수록, 진정한 양성평등 사회로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 그래서 나도 나쁜 페미니스트다


“나는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인간이다. 나는 페미니즘에 여러 가지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적어도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페미니즘에 대한 개념이 흐트러지고 있다면 내 잘못이 맞다. 나는 독립적이고 싶다. 하지만 누가 우리 집에 와서 나를 챙겨주었으면 좋겠다. (중략) 책임지고 싶고 존경받고 싶고 자기 관리를 잘 하고 싶지만 내 인생의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항복해 버리고 싶다. (중략) 나는 어떤 집안일은 남녀의 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내가 관심 없는 분야인 잔디 깎기, 벌레 죽이기, 쓰레기 버리기 같은 것들은 남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나는 사실 여성 공동체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그 개념이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며 그때마다 내가 얼마나 나쁜 페미니스트인가 상기하기도 한다. (중략) 어쩌면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운동에 중요한 이슈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의견을 낸다. 여성 혐오, 제도적 남녀 차별과 임금 불평등, 날씬한 몸매 숭상과 생식의 자유에 가하는 공격 등에 대해 아주 강한 의견을 갖고 있다. (중략)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모순적인 사람이지만 확실한 건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 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이다”

- 나쁜 페미니스트 中


흑인 여성으로서 상상도 못 할 아픔과 인종차별, 많은 불이익을 직접 겪어온 저자가 말한다. 자신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자신도 한없이 부족하고 모순적인 사람이라고. 다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 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그녀의 말에 나도 부담을 털고 용기를 얻어본다. 완벽할 필요는 없다.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 없다. ‘완벽함’이라는 것은 오히려 기득권층이 페미니스트에 대한 거리감을 형성하기 위해 씌워놓은 프레임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린 그저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면 된다. (‘나쁜 페미니스트’의 ‘나쁜’은 도덕적으로 '나쁜'이 아니라 ‘부족한’, ‘못 미치는’, ‘완벽하게 훌륭하지는 못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나는 부족한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 특권을 누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층임을 자각하지 못했다. 여성을 위한 다지만, 차별하고 있었다. 성평등을 주장하며 써 내려간 이 글에도 아직 내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성차별적인 관념이 드러나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언제, 어디선가 나도 모르게 성차별적인 생각과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에 혐오감을 느끼고 변하고자 노력한다. 부족하고 모순된 인간지만, 내 가족과 친구, 주위의 여성들이 개똥 같은 취급을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영역에서 모든 남녀의 평등을 추구한다’는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말이 바로 페미니즘의 본질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도 나쁜 페미니스트다. 그리고 저자의 말에, 나의 말에 동의한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나쁜 페미니스트이다. 

작가의 이전글 Everything passes with tim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