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겠습니다'를 읽고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어서 그랬을까. 제목에서 받았던 첫인상에 비해 많이 아쉬운 느낌이었다. 책 제목은 굉장히 능동적이고, 도전적인데 비해 막상 작가가 퇴사한 계기를 살펴보면 수동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불합리한 인사 발령을 받지 않았다면 굳이 퇴사할 생각도, 돈이나 물질에 대한 욕심도 버리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50세가 되어서야 퇴사를 한 것이 그저, 그 나이 때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였고, 독신이라는 점도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독자들의 공감을 얻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모든 이야기가 꼭 드라마틱할 필요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내겐 많이 아쉬운 책이었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이 책은 퇴사에 관한 책이지만 미니멀리즘에 관한 내용이 상당 부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가가 퇴사를 준비하면서부터, 안정적인 수입이 없어진다는 현실과 마주하면서 점점 미니멀리즘으로 가치관이 발전한 듯하다. 나도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공감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비이성적으로, 그리고 맹목적으로 돈과 물질을 추구한다. 퇴사에 관한 책이니, 취업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직업 선택에 있어 ‘고액 연봉’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는다. 단순하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 같고, 모두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하지만 아무도 그 선택으로 잃는 것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회사에서 돈을 많이 주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만큼 일을 시키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야근은 내 일상과 건강을 빼앗을 것이고 내 사람들과의 시간을 빼앗을 것이다. 좋은 차와 좋은 집으로 보상받는 듯 하지만, 그것들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일회성의 쾌락일 뿐, 지속성이 없다. 또한 높은 수입에 맞춰놓은 소비패턴(집 대출금, 자동차 할부금)은 시간이 갈수록 쉽게 바꾸기 힘들어지게 되고, 족쇄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내 삶에 있어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벌고 풍요롭게 살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무척이나 위험한 발상이다. 이 합리화의 근본은 ‘타인과의 비교’에 있고, 그 방점이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흔들리게 된다. 특히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한국 사회의 한가운데서 방심하고 있다간 언젠가 나도 모르게 타인과 비교하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큰 문제점은 소비에 있어서 물건의 본질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그 본질은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부와 지위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소비한다. 즉, 자기표현의 한 수단으로 인식하고 소비하는데 여기에도 ‘비교’라는 개념이 들어가게 되면서 소형차보단 중형차, 국산차보단 외제차를 소유하려 한다(심지어 지출을 감당할 능력도 없으면서). 그러나 본질을 놓친 소비는 결국 껍데기만 남을 뿐이다. 본질에 벗어난 소비를 자제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중요한 것들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돈을 얻을 수 있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버리고 비우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내고 인생의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말을 인용해 말하자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새 카메라를 사는 것보다 갖고 있는 사진기로 더 아름다운 사진을 찍는 즐거움’이다. 정말 행복했던 순간을 돌이켜봤으면 한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마다 ‘돈’이나 ‘물질’이 과연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지 않을까.
사실 이 책에 기대를 많이 했던 이유는 내 퇴사 경험 때문이다. 많지 않은 나이에, 인턴까지 포함하면 1년 6개월 동안, 난 총 3번의 퇴사를 경험했다.
첫 번째 퇴사
독일에 있는 물류회사에서 유럽에서 한국으로 가는 화물들의 선적 일정을 중간에서 조율하는 일을 맡았었다. 그런데 한국 고객사의 갑질이 도를 지나쳤다. 불가능한 일정을 요구하는데 합리적으로 이유를 설명해줘도 막무가내였다. 시차를 고려하지 않고, 새벽에 개인 전화로 연락하기 일수였다. 유럽의 파트너들을 푸시하라고, 말 그대로 지랄을 하든 뭘 하든 무조건 자기들 요구사항대로 진행하게끔 만들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난 그들처럼 몰상식한 짓을 똑같이 유럽 파트너들에게 하기 싫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짓을 한다고 될 일들이 아니었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어 결국 내 한계를 넘어섰고, 퇴사를 결정하고 귀국했다.
두 번째 퇴사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취업을 준비할 때 즈음, 이미 한국 기업 문화에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수직적이고 불합리적인 사내 문화, 업무보다 정치가 우선되는 환경을 수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결국 외국계 기업 쪽으로 취업 노선을 정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간 외국계 반도체 회사에서 참 악랄한 상사를 만났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훈련병’이라고 불렀고, 내 어깨에 기대어 담배를 폈다. 의미 없는 회식이 많았고, 업무와 관련 없는 사적인 것들을 내게 지시했다. 물론 한 달 반 만에 가차 없이 사직서를 내고 뛰쳐나왔다. (경험 상, 같은 외국계 회사라도 실제로 외국인이 함께 근무하는가가 그 문화에 굉장히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모회사가 어느 나라인지도.)
세 번째 퇴사
헤드헌터를 통해 외국계 식품회사에 ‘정규직’으로 최종 합격을 했다. 당시 나는 ‘졸업 유예’ 상태였다. 하지만 모든 학점을 이수했기에 정상적인 회사 생활이 가능한 상태였고 면접 때 이 상황에 대해 모두 설명했다. 하지만 인사과에서 이를 꼬투리 잡고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6개월 계약직 후 정규직 전환’을 제안했다. 최종 합격을 통보한 후, 마지막에 말을 바꾼 것이다.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고, 헤드헌터를 통해 나름 의견을 피력하긴 했지만, 어쨌든 뭐 졸업장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6개월 동안 열심히 회사생활을 했다. 내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남들은 다 퇴근할 때 홀로 남아 열심히 했고, 그에 상응하는 성과도 내었다. 함께 일한 과장님과 팀장님께 모두 인정받았고 우리 모두 당연히 정규직 전환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인사과에서 또 말을 바꾸었다. 업무 중 기술적인 부분이 포함되어있는데 아직 그 부분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신입을 뽑겠다면서 경력직 채용의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그리고 내게 전환이 아닌 계약 연장을 제안했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과장님과 팀장님께서 인사과에 이의를 제기하고 상무와 면담을 진행하는 등 최선을 다해주셨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물론, 계약직 연장을 받아들인다면 이후 정규직 전환이 될 가능성은 컸다. 하지만 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선택이었고, 불합리함에 굴복하기 싫었다. 계약 연장을 수용한다면, 그들의 불합리함에 당위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고 선례가 되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결국 퇴사를 결정했다. 물론 인사과에 제출하는 회사 평가서에 그들의 불합리한 업무 진행과 대우에 대해 신랄하게 갈겨쓰고 나왔다.
주변 사람들은 그만 까칠하게 굴고, 순응하라고 한다. 이게 한국 사회라고들 말한다. 물론 나도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아니기에 안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결코 수준 높은 이상적인 것들이 아니다. 지극히 기본적이고 정상적인 것들이다. 비정상이고 기본이 안된 것은 그들인데, 왜 신념을 굽히고 굴복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 그리고 난 아직 젊다. 책임져야 할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때 아니면 언제 발악해보고 객기라도 부려보겠나.
그래서 난 지금 4번째 취업을 준비 중이다.
‘퇴사’보다 중요한 것은 ‘입사’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있어 ‘일’이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 확립해야 하고, 그 기준에 충족하는 회사를 찾아 입사해야 한다. ‘일’에서 무엇을 얻을 것이며,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해 봐야 한다.
작가 같은 경우는 회사 생활을 하는 도중 가치관을 확립해가고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퇴사를 결심했지만, 나는 이 기준이라는 것이 회사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일정 수준 이상은 반드시 확립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회사가 우리를 선택하듯이, 우리도 각자 고유한 기준을 가지고 회사를 선택해야 한다. ‘일’에서 자아를 찾고 싶은지,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하는지,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를 맞추고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인지 등 자신에게 맞는 기준을 정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전의 양면을 모두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남들이 다 똑같은 선택을 하니까, 좋아 보이니까’ 하며 맹목적으로 고액 연봉을 제시하는 회사를 좇지 말고, 그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본인이 감내할 수 있는지까지 포괄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한쪽 면만 보고 판단해버리면 잘못 꿴 첫 단추를 풀기 위해 더욱 수고로워질 수밖에 없다. 물론 기준을 정한다고 해도 나처럼 몇 번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준을 세움으로써 실패 확률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실패를 거듭하면서 기준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그렇게 세운 내 기준이 옳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고, 우리는 그 한 번뿐인 인생의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주도권을 통해 우리 자신과 우리들에게 진정 소중한 것들을 보살피고 지켜내야 한다. 물론 힘들 것이다. 그래도 최대한 할 수 있는 것들은 끝까지 해봐야, 아닌 건 아니라고 몇 번 목소리는 내봐야 내 자신을, 나의 삶을, 그리고 이 사회를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