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대하여
"이사님, 더 이상은 못하겠습니다. 저 한국으로 돌아갈게요."
좋아했던 겨울이 내 눈 밖에 나기 시작한 것은 독일 함부르크에서의 겨울 때문이었다.
함부르크, 그러니까 북반구에 위치한 항구 도시의 겨울 날씨는 지독했다. 나는 태어나기를 날씨에 민감하게 태어났는데, 햇빛을 볼 수 없으니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출근하는 시간엔 아직 해가 뜨지 않았고, 퇴근하는 시간엔 이미 해가 져서 깜깜했다.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처럼 변덕이 심한 날씨는 우박이 떨어지고 눈보라가 치다가 갑자기 해가 쨍쨍하게 뜨기를 반복했다. 강한 바람 때문에 우산은 매번 망가지기 일쑤였어서, 한국에서 챙겨간 바람막이가 헤질 때까지 뒤집어쓰고 다녔다. 이제 생각해보니, 해가 조금이라도 쨍하고 뜨면 현지인들이 왜 그렇게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와 도시락을 까먹고 일광욕을 즐겼는지 알겠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일상의 사소한 문제들도 일생일대의 큰 위기처럼 다가왔다. 주민센터에 가서 전입 신고를 하고, 식당에 가서 메뉴를 고르고, 휴대폰을 개통하는 일들이 더 이상 간단한 일들이 아니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과 별개로 독일어를 1도 모르는 나로서는 글자를 읽을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메뉴를 읽지 못해, 매번 같은 음식만 시키고, 독일어로 온 편지들을 읽지 못해 룸메이트한테 해석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 스스로 처리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계속해서 쌓여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힘겹게 버티던 나를 완전히 무너트린 건 직장생활이었다. 갑질하는 한국 고객들의 무리한 요구들이 계속 이어졌고, 시차를 무시한 업무 전화에 새벽에 잠을 깨기 일쑤였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너무 수치스러워, 현지 파트너들에게 고객의 무리한 요구를 전달하지 않고 중간에서 어떻게든 끊어내려 했다. 내 속은 썩어 곪기 시작했고, 사람이 너무 분하고 화가 나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날, 전화기 너머로 고객의 X 같은 소리를 듣던 와중이었다. 뒷덜미를 타고 피가 거꾸로 솟기 시작하고, 어깨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두 눈가가 뜨겁게 시리기 시작하더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이사님 방에 찾아가 펄떡이는 감정을 겨우 추스르면서 말했다.
"이사님, 더 이상은 못하겠습니다. 저 한국으로 돌아갈게요."
그렇게 결국 약속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난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해 겨울은 내 인생에서 가장 밀도 있는 시간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고독했으며, 사람을 좋아했던 내가 사람을 경멸하게 되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좋아하던 겨울을 싫어하게 되었다. 겨울은 더 이상 운동장에 소복이 쌓인 하얀 눈과, 엄마가 만들어줬던 따뜻한 코코아, 그리고 머라이어 캐리의 노래를 생각나게 하는 계절이 아니었다. 더 이상 설레며 기다리고 따뜻하게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버티는' 시간들이 되어버렸다.
사실 좋았던 기억들도 있고, 내 인생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점들도 많다. 사람과 일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생겼고, 독일의 여러 선진 시스템과 문화를 접하면서 사고의 틀과 시야도 넓어졌다.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와 끝없는 지평선을 보면서 쉽게 느낄 수 없는 감정과 기억들을 품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한국에 돌아와서도 내 기준에 맞는 회사를 찾기 위해 4번이나 직장을 옮겨 다녔고, 지금은 나와 잘 맞는 회사를 찾아 좋은 동료와 함께 일을 즐기고 있다. 그때의 압축된 경험들로 얻어진 나름의 통찰이 없었다면, 지금 뒤늦게 또 다른 고민과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찬 공기가 코끝을 스치기 시작할 때면, 그 겨울의 시간과 감정들이 취기처럼 차오른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유난히 겨울은 그때 생각이 많이 나서 외롭고 힘들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내게 참 어려운 질문이다. 봄, 여름, 가을은 맑은 날씨와 충분한 일조량, 선선함 때문에 단순하게 좋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겨울을 마냥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부모님에게 느끼는 복잡한 애증의 감정을 겨울에서 느끼곤 한다.
다만, 앞으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제는 더 이상 겨울이 마냥 '버티는' 계절이 아니었으면 한다. 조금은 덜 버티고, 조금은 더 순수하게 겨울을 좋아했던 시절의 감정들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한참 어렸을 때는 겨울마다 멜빵이 달린 우스꽝스러운 스키복을 입고 설레어하며 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옷은 창피해서 도저히 다시 입을 수 없지만, 그 마음만은 다시 꺼내어 지금의 내 마음에 도배하듯 덧칠하고 싶다.
아무튼, 난 겨울을 좋아했고, 또 증오했고, 그리고 이젠 다시 좋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