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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펜 Dec 25. 2017

길은 인간의 수만큼 존재한다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 아오노 슌주


1.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


어디선가 ‘인생은 마라톤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뒤집어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일본의 한 광고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광고에선 정해진 마라톤 코스를 서로 경쟁하며 달리던 주자들이 갑자기 코스 밖으로 뛰쳐나가며 각자 자신의 코스대로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가 결정한 코스인가? 길은 하나가 아니다. 결승점은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수만큼 존재한다.”는 내레이션이 깔리며 광고는 끝이 나게 된다. 정확히 무슨 광고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20대 초반,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던 당시, 그 광고를 보고 가슴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의 주인공인 시즈오 씨는 마라톤 코스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주자라 볼 수 있다. 그는 되는대로 취업하고 15년을 별생각 없이 회사 생활을 하다 40세가 되던 해, 난데없이 사표를 던지고 만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꾸역꾸역 그린 만화를 들고 출판사에 계속 찾아가지만 고배를 마시기 일쑤다. 결국 책장을 덮을 때까지도 속 시원하고 드라마틱한 성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즈오의 선택은 실패한 것일까? 그는 결국 정해진 코스대로 달려야만 했던 것인가?


2. 길은 인간의 수만큼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 작가가 끝까지 시즈오 씨의 등단을 결정짓지 않은 것도 결국 그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결과가 있었다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시즈오 씨가 묵묵히 만화가의 길을 계속 걸었을 것이라는 거다. 퇴사 이후의 시즈오 씨의 삶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한숨과 실소를 내뱉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모든 압박과 무시에도 그는 달팽이처럼 느리게 가는 한이 있어도 절대 멈추지 않았고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 지금도 시즈오 씨는 계속해서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 이정한 방향으로 솔직하게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길, 즉 인생을 사는 방법과 속도는 인간의 수만큼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 모두가 의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사람들의 인생을 ‘성공한 인생’과 ‘실패한 인생’으로 나누고 서로 비교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길(좋은 대학, 대기업, 공무원, 30대에는 결혼 등)로 가도록 강요하고, 그 길을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따가운 시선을 던지며 함부로 ‘실패’라는 꼬리표를 붙여버린다. 


하지만 인생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고, 타인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는 시즈오 씨가 그저 40대의 한심한 루저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에겐 그를 믿어주는 가족이 있고, 서로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친구가 있고, 그를 통해 긍정적인 변화와 용기를 얻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솔직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충분히 멋지고 의미 있는 인생이다. 


세상에는 존재하는 사람 수만큼 그들의 인생이 있고 각각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타인과 비교하고 서로를 함부로 판단하기보다 그에 앞서 시즈오 씨처럼 자신에게 솔직한 인생을 살아보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인생의 시작은 외부가 아닌 자신의 내면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3. 인생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


이 책이 던지는 또 한 가지 메시지는 인간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시즈오 씨와 그 주변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 보기엔 하나 같이 못난이들이지만,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집단 따돌림, 이혼, 불우한 가정환경과 같이 모두 힘들었던 과거와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꿋꿋이 살아간다. 비록 삐걱거리고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지만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며 일상을 만들어간다. 특히 5권에서 유서를 남기고 떠난 친구 미야타 씨의 빵집을 끝까지 지키는 시즈오 씨와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힘들었음에도 시즈오 씨에게 돌아와 다시 한번 살아갈 용기를 내보는 미야타 씨가 부둥켜안고 우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가장 감명 깊은 장면이었다. 


현실에서도 이 못난이들처럼 누구에게나 각자 쉽게 말하지 못할 아픔과 상처가 있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렇다. 그리고 사실 이게 참… 많이 어렵다. 누구 앞에서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내 상처를 보여주었을 때 상대가 부담을 느껴 멀어지지 않을까, 모두가 각자 말 못 할 이야기들이 있을 텐데 나만 티를 내는 것이 엄살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저 나 홀로 감당해야 하는 몫이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기억들을 망각하려 애쓰고 오랜 시간 부정하며 지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시즈오 씨와 미야타 씨를 보니 역시나 언젠가는 내 못다 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상대는 한 명. 단 한 명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해주고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길고도 긴 인생, 참 살맛 날 것 같다.


잔잔한 웃음과 기분 좋은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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