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수업'을 읽고
올해 인상 깊게 본 영화 중 ‘컨택트’라는 영화가 있다. 언어학자인 주인공이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들과 소통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외계인과 소통할 것이 아니라 전쟁을 벌여 쫓아내야 한다고 국제적 여론이 기울어가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교류한 끝에 결국 그들의 언어를 터득하고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말로만 들으면 황당무계한 SF영화로 오인할 수 있겠으나, 뿅뿅 미사일만 오가고 스토리는 쓰레기통에 갖다 버린 싸구려 SF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작품이라고 어필하고 싶다.) 스토리도 탄탄하고 소통과 화합 등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였지만 ‘언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한다’ (미래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라는 메시지가 가장 인상 깊었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흐른 뒤 읽게 된 이 책에서 느낀 점도 동일한 내용이었다. 바티칸 대법원의 변호사라는 작가는 본인의 경험과 라틴어를 매개체로 독자들에게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그중 내게 가장 와 닿았던 것은 ‘언어는 사고의 틀이다’라는 메시지였다. 아마 최근 2~3년간, 외국과 한국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직접 온몸으로 느끼고 공감했던 내용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작가는 라틴어가 상대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내려다보지 않습니다. 수평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죠. 과거 로마가 스페인을 정복하고, 북아프리카를 정복해 식민지로 삼았지만 스페인이나 북아프리카 사람들은 로마에 지배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로마는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 중 우수한 인재들을 사회 전반에 기용했고, 이들은 로마 제국의 경영, 경제, 군사 분야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언어는 사고의 틀입니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수평선을 가지고 있는 라틴어가 로마인들의 사고와 태도의 근간이 되었을 겁니다. "
“동갑내기 친구들만 말을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어느 정도 알고 지내면 선생과 학생 간에도 말을 놓을 수가 있습니다. 이탈리어의 경우 그렇게 말을 놓을 때 “파를리아모 델 투 Parliamo del tu”라고 말합니다. “우리 말을 놓자”라는 의미입니다. 독일어의 경우도 ‘두젠 dozen (너라고 부르다, 말을 놓다)’과 ‘지이첸 siezen (Sie라는 호칭, 존칭을 쓰다)’이라고 하여 서로 어느 정도 알고 지내면 서로가 동의할 때 ‘너’라고 말해도 전혀 무례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무척 공감했던 내용이었다. 독일에서 인턴생활과 외국계 기업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 외국인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어 보면 확실히 한국어로 한국인과 소통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계급이 높든 낮든, 자유롭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보다 대화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고,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외국계 회사를 다니던 때, 서울에서 워크숍이 열려 유럽 본사 및 아시아 각국의 동료들과 일주일 정도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그들 모두가 신입사원이었던 나보다 나이도 당연히 많고, 직급도 높았지만 절대로 나를 하대하지 않았다. 좀 친해지고 나니 적어도 10살은 많은 싱가포르 출신의 동료와 어깨동무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다트를 던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워크숍 막바지에 유럽 본사 직원과 일정을 동행한 적이 있었다. 해당 일정 이후 바로 출국해야 했기 때문에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온 그를 도와주기 위해 캐리어 하나를 대신 들어주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는 완강히 거절하며 내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괜찮아, 내가 들 수 있어, 너는 내 시중을 들으러 온 사람이 아니잖아”
반면, 한국어는 굉장히 수직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서로 나이부터 물어본다. 서열 정리가 끝나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은근슬쩍 반말을 하기 시작하고 어린 사람들은 이에 순응한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높은 직급을 가진 사람들은 직급이 낮은 사원들에게 반말하고 하대한다. 높은 직급을 부여한 것은 그간의 업무 경험을 토대로 더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란 의미인데(돈을 더 주잖아), 그들은 주어진 자리의 본질은 파악하지 못하고, 아랫사람들을 하대하는 자리쯤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존중의 기준은 나이나 직급이 아니라 ‘인품’이 되어야 한다. 거지같이 행동하는데 나이가 많다고 존중해줄 필요도 없으며, 나이가 어리더라도 생각이 깊고 올바른 성품을 보여준다면 마땅히 존경을 표해야 한다.
나는 이런 그릇된 사고방식들이 한국어의 수직적 구조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이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반말과 존댓말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형태가 불필요한 위계질서를 형성시켰다. 대화나 업무의 본질에 집중하지 않고 서열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장애물로 작용했고 세대 간 격차를 심화시켰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한국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유교 문화의 영향, 그리고 세종대왕님의 본래 의도에서 벗어나 잘못 사용하고 있는 우리들이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우리 사회는 현재 한국어라는 틀에 갇혀, 굉장히 수직적이고 제한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요즘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 나 모임에서, 우리 모두가 다 같이 ‘반말’ 아니면 ‘존댓말’, 둘 중 하나만 하는 구조로 한국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반말이 없어지면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친근감을 어떻게 표현하고, 존댓말이 없어지면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냐고 질문을 받는다. 하지만 난 그러한 문제는 오히려 한국어에 기존의 ‘반말 ↔ 존댓말’이라는 상대적 구조가 존재했기에 오는 쓸데없는 우려, 착시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반말이든 존댓말이든 하나만 존재했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벌써 언어가 사고의 틀을 규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존중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지 않은가. 진심 어린 존경을 표하고 싶다면, 어조나 목소리, 눈빛 등을 통해 충분히 전할 수 있다.
모두가 동일한 높이의 언어를 사용해야 같은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존중하는 사고를 할 수 있다. 요즘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들이 유행이다. 부유한 부모님 자식으로 태어나느냐, 가난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시작 지점이 달라진다는 말을 비유한 것이다. 나는 언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이나 계급에 따라 쓸데없이 시작부터 너와 나의 눈높이가 달라질 필요가 없다.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할지 안 할지는 수평적인 관계를 형성해가며 시간을 가지고 판단하면 된다. 비록 실현 가능성은 굉장히 낮은 주장이고 아직은 혼자만의 꿈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같이 해봤으면 좋을 것 같다. 함께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p.s. 위 언급한 내용들은 ‘라틴어 수업’의 극히 일부분의 내용이다. 책 제목 때문에 굉장히 딱딱하고 학습적인 내용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쉽게 라틴어에 대해 풀어놨고, 작가가 겪고 느낀 다양한 이야기들에 많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라틴어를 매개체로 한 인생 수업이랄까. 박웅현씨의 ‘여덟 단어’와 비슷한 느낌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