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한국에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먼저 소개되었다가 원제를 따라 다시 ‘노르웨이의 숲’으로 출간되었다.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왜 원제가 아닌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출간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이라는 제목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 상실의 시대는 너무 직접적이고 건조하다. 작가가 함축해놓은 상징들을 찾아 읽는 재미가 반감되어버린다. 책장을 덮은 후, 나오코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들으며 노랫말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더욱 그렇다. 'Norwegian wood'의 이국적인 포크 멜로디는 하얀 겨울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그녀를 떠오르게 한다. 경쾌한 기타의 리듬 속에는 그녀가 느끼는 추위와 외로움이 스며들어 있어 복잡 미묘한 감정이 차오르게 된다.
소설에는 주인공 ‘와타나베’와 그의 절친한 친구 ‘기즈키’, 그리고 기즈키의 여자 친구 ‘나오코’가 등장하며 시작된다. 여기서 나오코와 기즈키는 ‘완벽한 순수’를 상징한다. 그 둘은 서로가 그들의 세계 그 자체, 그리고 전부였다. 다른 사람들과는 이질감을 느끼고 현실 세계에 쉽게 동화될 수 없었다. 와타나베는 그들을(완벽한 순수를) 아끼고 동경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와타나베가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통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기즈키가 갑자기 자살을 하게 되고 나오코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상실의 아픔을 공유하며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오코는 이미 친언니의 자살이라는 또 다른 아픔이 있었고 결국 현실을 떠나 산속에 깊숙이 위치한 요양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요양원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고,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의 순수한 세계였다. 히피족도 생존을 포기하고 떠나간, 외부 세계와 완벽히 차단된 세계였다. 와타나베는 그곳을 오가고, 편지를 쓰며 그녀가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면회를 마치고 그녀를 떠나 현실과 다시 마주할 때면 그 괴리감에 혼돈과 좌절을 겪기도 한다. 그만큼 그는 나오코를, 완벽한 순수를 동경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나오코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와타나베는 '미도리'라는 (현실 세계에 머물고 있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죄책감에 괴로워하게 된다.
결국 나오코는, ‘완전무결한 순수’는, 현실세계에서 생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나오코를 사랑하고 동경했던 와타나베도 현실에 머무는 미도리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 37살이 된 와타나베는 함부르크로 가는 비행기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듣고 나오코를 회상한다. 그리고 그는 기억은 멀어져 갔다며, 그녀에 관한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나오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되뇌인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와 죽은 자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진다. 기즈키는 열입곱인 채로, 나오코는 스물하나인 채로, 영원히."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착각이다. 그는 나오코를 사랑했고 나오코도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나오코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단지 덮여질 뿐. 어디선가 ‘Norwegian Wood’가 흘러나오면 우리는 어김없이 그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좋아하는 노래 중에 가수 하림의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라는 노래가 있다. 한 때 ‘음 그래, 그렇지’ 라며 노래 제목에 공감(공감하는 척)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 이 노래에 관한 하림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고 순간 가슴이 찌릿했다.
"이 노래는 사실..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웃음) 사랑에 잊힌다는 건 없습니다. 그냥 덮일 뿐이죠."
그렇다. 잊힌다는 건 없다. 단지 덮여질 뿐이다. 우리 모두 순수했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리고 순수한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하나 둘 먹어가면서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벽한 순수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지속될 수 없음을 지켜보며 우리의 날개는 하나 둘씩 부러져 가고 좌절한다. 그렇게 순수는 현실에 의해 완전히 잠식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순수 위에 현실이 덮여질 뿐, 우리는 마음속에 영원히 순수를 품고 성장해간다. 더 이상 훨훨 날 수는 없지만, 대신 이 현실 속에서 두 발로 자신의 생을 걸어갈 방법을 배우며 어른이 되어간다. 색이 바래고 조금 찌그러지긴 했지만, 세속적인 현실에서도 순수는 빛을 잃지 않고 사랑, 우정, 아이의 미소 등 다양한 형태로 우리 생의 원동력이 된다. 나오코가 세상을 떠나고 현실에는 미도리가 남았다. 하지만 미도리도 충분히 사랑스럽고 순수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와타나베도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기즈키와 나오코의 죽음 앞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라고 되뇌는 와타나베의 말처럼 죽음은 이 세상과 완벽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일부가 되어 계속 존재할 것이다. 반대로 사랑도, 순수도 마찬가지이다. 덮여지고 덮여질 뿐, 절대로 우리와 완벽하게 분리되거나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슬픔을 감내하며 마음속에는 순수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가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 어떤 아픔을 느낀다면, 그 아픔을 남은 인생 동안 계속 느끼도록 해. 그리고 만약 배울 게 있다면 거기서 뭔가를 배우도록 하고. 하지만 그와 별개로 미도리와 둘이서 행복을 찾도록 해. 와타나베의 아픔은 미도리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잖아. 그 사람한테 더 상처를 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 거야. 그러니 괴롭겠지만 더 강해져. 더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거야."
– 레이코, 노르웨이의 숲
“이 노래를 들으면 때로 나는 정말 슬퍼져.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마치 깊은 숲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 들어. 춥고 외롭고, 그리고 캄캄한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러 오지 않아. 그래서 내가 원하지 않으면 레이코 씨는 절대로 이 곡을 연주하지 않아.”
– 나오코, 노르웨이의 숲
“나는 한때 한 여자를 알았지.
아니,
그녀가 한때 나를 알았다고 얘기해야 할지도 몰라.
그녀는 내게 자신의 방을 보여주며 말했네.
‘좋지 않아요?
’라고.
그녀는 내게 그곳에 머물러 달라고 청하면서 어디에든 앉으라고 말했네.
그래서 난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거기에는 의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난 양탄자 위에 앉아서 시름을 잊고 그녀의 포도주를 마셨다네.
우리는 두 시까지 얘기했어.
그녀는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해요.
’라고 하면서 내일 아침에는 일해야 한다고 내게 말하며 웃기 시작했다네.
나는 내일 일을 안 해도 된다고 얘기해 주면서 잠자리에 기어 들어갔다네.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홀로였고,
새는 날아가 버렸다네.
그래서 난 불을 지폈지.
좋지 않아?
노르웨이 숲에서.”
– Norwegian Woods, 비틀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