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소설은 영국의 집사인 그가 평생을 다 바쳐 관리하던 달링턴 홀에 새로운 주인이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뜻밖의 휴가를 받고 오른 여행길에서 집사로서 살아온 그의 지난날들을 회상하는 내용들을 보자면 단순히 집사의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내는 듯하다. 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서 무비판적인 사고와 아집, 대책 없는 순진함이 어떻게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그릇된 결과를 빚어내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스티븐스는 프로페셔널한 집사이다. 달링턴 홀의 일거수일투족을 완벽하게 관리하는 한편, 세계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밀회들이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투철한 직업정신을 발휘한다. 동료 켄턴양에 대한 사적인 감정과 아버지의 임종마저도 뒤로한 채, 그가 모시는 달링턴 경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기에 그는 소설 내내 독자에게 그의 집사로서의 커리어와 품위를 강조하고 설득하려 든다. 하지만 그는 그런 직업적 소명에만 몰두한 나머지, 세상사를 직시할 두 눈과 귀를 닫아버린 채,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버린다.
그가 모셨던 달링턴 경은 인자하고 순진한 사람이지만 마찬가지로 사리분별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히틀러에게 이용당하고 배신자로 낙인찍혀 쓸쓸히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다. 이런 사람을 단순히 주인이라는 이유로 스티븐스는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떠받들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하인 둘을 해고하라는 달링턴 경의 지시에 아무런 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이행하는 장면만 보아도 그의 그릇된 맹목적 신뢰와 사리분별능력의 결여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이 에피소드 외에도 그 나름의 생각과 독백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그 넋두리들은 결국 자신의 과거 행동들에 대한 정당화의 노력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는 협소한 ‘프로페셔널’에 심취한 나머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인류 보편적 가치를 함양하는 데는 심각한 ‘아마추어’였다. 작가는 이런 그를 내세워 사유의 확장과 자기성찰이 결여될 경우, 어떠한 우를 범하게 되는지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스티븐스를 보면서 요즘 유행하는 ‘꼰대’라는 단어가 문득 생각났다. 꼰대는 젊은 세대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어른들을 비꼬는 단어쯤으로 볼 수 있는데, 나는 단순히 나이의 문제라기보다는 스티븐스처럼 자기성찰 없이 고착화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꼰대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다시 말하자면, 꼰대와 꼰대가 아닌 사람을 나누는 정확한 기준은, ‘끊임없이 사유를 하는가’, ‘자기성찰을 하는가’라고 생각한다. 시대는 쉴 새 없이 변한다. 가치관도 바뀌고 생활양식도 바뀌어 간다. 수백 년 동안 당연시 여겨졌던 사회보편적인 가치도 언젠가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 단순히 변해가는 세상을 따라잡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부적으로는 각자의 인생의 키를 잡고, 외부적으로는 다양한 배경과 가치관을 가진 이들과 함께 사회를 옳은 방향으로 일구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유년기, 청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면, 누구나 각자의 경험들이 쌓이고 그것들을 토대로 가치관과 같은 관념들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관념들을 토대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그 관념들이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그릇된 방향으로 형성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정 상황들에 대해 순간적으로 오판했을 수도 있고 오래전 정답이라 확신했던 사안이 언젠가 명백한 오답이 될지도 모른다. 부분만 보고 전체를 판단했을 수도 있고, 부수적인 것들에 사로잡혀 본질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양쪽이 아닌 어느 한쪽의 의견만 듣고 섣부르게 결론 지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가치관이 형성되었다면 끝이 아니라 그제야 비로소 우리의 소명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쌓아온 관념들에 대해 계속해서 의문을 던져보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사유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 스티븐스의 무비판적인 사고와 아집에서 볼 수 있듯, 외골수처럼 확장 없이 쌓아 올리기만 한 탑은 결국 중심을 잃고 무너지기 마련이다. 수백번, 수천번 쌓고 허물기를 반복해야 한다. 높이 쌓아 올렸다가 그 위에서 한번 세상을 둘러보고, 또 다른 길이 보이면 스스로 허물고 좀 더 넓은 지지기반을 다진 후, 다시 쌓아 올리는 것이다. 더 튼튼하게, 더 넓게 말이다. 그렇게 각자의 사유의 범위가 튼튼해지고 넓어진다면, 그것을 기반으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올바른 방향으로 키를 돌릴 수 있을 것이고, 타인과의 교집합도 점점 넓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꼰대가 아닌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허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제목처럼 스티븐스에게는 남아 있는 나날들이 있다. 여행의 말미에 스티븐스도 결국 그의 지난 과오를 되짚어보며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음에 괴로워하는데, 이를 본 한 노인은 아래와 같이 말을 건넨다.
“만날 그렇게 뒤만 돌아보아선 안 됩니다. 우울해지게 마련이거든요. 그래요, 이제 당신은 예전만큼 일을 해낼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건 우리도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사람은 때가 되면 쉬어야 하는 법이오. ᆢ그래요,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비록 아침과 점심은 망쳐버렸지만 그에게는 저녁이 남아있다. 어쩌면 35년동안 지내온 달링턴 홀을 떠나 세상으로 여행을 나서기 시작한 그때부터 스티븐스도 처음으로 스스로를 허물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을까 희망해본다. 그에게는 아직 수백번이고 수천번이고 허물고 쌓을 시간이 명백히 존재한다. 부디 그의 저녁은 그동안 외면해왔던 올바른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찾는 과정이 그려지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