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펜 Dec 23. 2017

수렴하는 삶

'피로사회'를 읽고

피로사회 - 한병철


1.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피로사회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류는 각 시대마다 생존을 위협하는 각종 바이러스와 싸워왔다. 천연두, 흑사병, 사스 등과 같은 무시무시한 질병들 앞에서도 인류는 위기를 넘기며 생존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의 역사 끝에 항생제의 발명,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피로사회는 현대의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치명적인 질병의 위협 앞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그 질병은 더 이상 바이러스처럼 외부로부터 우리를 위협하지 않는다. 바로 우리의 내면에서,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갉아먹고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있다.


2. 성과사회,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는 시대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로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등 방어의 대상이 타자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질적인 대상들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며 부정의 자세를 취하며 스스로를 방어해왔다. 하지만 세계화가 가속되면서 현대는 모든 영역에서 경계선이 사라졌고, 우리가 지니고 있던 ‘부정성’은 점차 소멸되었다.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면역학적 차원에서 차이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관광객, 또는 소비자는 더 이상 면역학적 주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현대에 우리를 위협하는 치명적이고도 새로운 질병은 도대체 무엇인가? 피로사회는 그것은 우리 내면에서 발생하는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폭력, 병리적 상태라고 말한다.


봉건 사회, 근대 사회는 ‘규율 사회’로 인간은 복종 주체로써 착취당해왔다. 즉 기득권을 소유한 타자, 그들이 만든 규율에 의해 강요 받고 채찍질 당하며 생산활동을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점점 복종 주체들의 반발이 심해지면서 생산성의 향상이 한계에 부딪히게 되자 자본주의는 ‘성과 사회’ 라는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냈다. 복종 주체가 아닌 성과 주체로써 타자의 착취가 아닌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자유’라는 감정을 이용해 스스로가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역설적인 시스템이 형성된 것이다.


성과사회는 무한정한 '할 수 있음', ‘긍정’을 강요하며,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개인이 더 이상 ‘성과’를 낼 수 없을 때,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을 때, 강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스스로 떨어지도록 내몰아 버리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생산성의 극대화에 따라 자극 과잉, 정보 과잉, 충동 과잉 등의 과잉 현상들이 나타나면서 우리의 지각을 분산화시키고 깊은 주의, 즉 사색적 주의를 몰락시켰다. 현대인들은 멈추어 오랫동안 머물며 '좋은 삶'에 대해 사색하는 것을 경시하고 오로지 성과를 내기 위해 질주하는 폭주 기관차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분노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가고 있다.”


3. 수렴하는 삶


항상 이런 생각을 해왔다. '우리 모두가 조금은 천천히 살아가기로 약속한다면 삶의 질이 다 같이 높아지지 않을까, 왜 우리는 걸어도 되는 거리를 전력질주하며 주변의 소소하고도 아름다운 풍경들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성과를 내는 것, 적당한 경쟁과 긴장감을 유지하며 생산성을 향상 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사회는 정상의 범주를 훨씬 넘어 미친 사회가 되어 버렸다. 단순히 개개인의 성과를 내는 것,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것을 넘어 오직 성과로만 타인을 판단하고 비교하며 본인의 생존을 위해 타인까지도 짓밟고 있다. 절대적 생존만이 유의미한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좋은 삶', '연대의 삶'에 대한 사색과 논의는 쓸데 없는 것으로만 치부되어지고 있다.


이제는 이 폭주하는 기관차의 선로를 끊어야 할 때이다. 더 많은 성과와 자본이 더 나은 삶을 낳을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무한대로 발산하는 수열이며, 브레이크가 없으며, 자기 자신이 지쳐 떨어져 나가야 끝나는 폭력적인 비극이다. 성과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내면 충분하다. 그 이후의 시간은 '좋은 삶'에 대해 사색하고 실현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식사 하고, 산책하고, 지는 해를 감상하며 그 순간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평온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수렴하는 삶', 우리가 가져야 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나는 이렇게 이름을 붙이고 싶다. 끊임없는 성과의 강요, 타인과의 비교, 물질에 대한 욕구 등 이 모든 발산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나' 자신에게로 수렴하는 삶. 나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사색하고 실현하는 삶. 모든 것이 발산하는 시대에서 홀로 수렴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매 선택의 순간 끊임없는 유혹으로부터 도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수렴하는 삶이야 말로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지켜낼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이자 옳은 선택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