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현 행복코치 Jul 10. 2016

나를 키운 많은 업무들 (2/2)

스스로 찾아가면서 일을 하다...

여러 가지 일들이 머릿속을 날아다닌다.


회사 간 합병을 위해 두 회사의 인사담당과장이 머리 맞대고 전략을 짜기도 했고, 노조 문제를 어설프게 꺼냈다가 팀장님이 본사로부터 혼꾸멍이 나게 만들기도 했다. 좌충우돌, 우왕좌왕의 직장생활이었다.


본격적으로 내가 나서서 주도적으로 일을 시작했던 때는 과장 2년 차 정도였다. 당시 인사총괄을 담당하는 파트장이었는데, 그룹 내 구조조정으로 근무했던 회사가 다른 회사로 합병이 되는 상황이었다.


본사는 우리 회사인데, 합병되는 회사가 더 큰, 역전되는 상황이었다. 합병회사 본사가 있는 구미를 들락거려 정리를 했더니 3개월 뒤에 다시 다른 회사로 이관이 되었다. 회사 간 합병설이 나오고 나자 회사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상대방 회사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공공연히 "점령군"이라고 했다. 선릉역에서 여의도 트윈타워를 발이 닳도록 들락날락했다. 조금이라도 좋은 처우를 받기 위해 회사 대표로 협상을 하기도 했다.

 
일개 과장으로 거대한 기업의 인사부서와 협상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조건을 제시하기 위해 며칠을 고민해서 방안을 수립하고 다시 협상하고 또 결렬되고. 그때 했던 말은 지금 내가 생각해도 화끈거리는 말들이 있다. '이쁘게 잘 보이려고 화장시켜 데리고 왔는데, 무슨 이런 식의 처우냐'고... 정말 그때는 화도 많이 났다. 그렇게 힘들게 협상을 해서 좋은 조건으로 진행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늘 그렇듯이 이익을 본 사람은 침묵하고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발을 부는 상황 때문에 마음이 참 많이 힘들었다.


같은 그룹 내 회사였으나 끝까지 어디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달려서 함께 다녔다. "OO 출신인데도 일은 그럭저럭 잘 하네". 그게 그 당시 내부에서 돌던 이야기였다. 은행 간 합병된 곳에는 아직도 이 은행 출신, 저 은행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고 그에 따라 승진이나 처우도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같은 이니셜을 쓰는 한 지붕 내 조직 간에도 알게 모르게 벽이 있음을 느껴봤기에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다.


돌아보면 그룹사 중 마지막에 근무했던 LG CNS에서 근무한 시간이 가장 김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LG전자 출신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생활에서 가져야 하는 기본지식과 태도를 배웠고, 그리고 가장 많은 것이 남았던 시기였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나 보다.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첫 입사한 회사를 친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정 때문인지.


LG CNS에서도 참 중요한 일들을 담당했다. 첫 담당업무는 역시나 급여와 복리후생 전체를 이끄는 역할이었다. 그 뒤에는 채용 조직을 총괄해서 운영했었고, 그리고 임원인사, 고위 조직담당자 승진 등 굵직굵직한 일들을 담당했다. 명예퇴직제도를 도입하고, 승계자 제도를 운영하고, 평가와 승진, 리더십 진단, 그리고 조직문화라는 참으로 답이 없는 일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 2주 넘게 출장을 가서 학생들을 만났던 일들이며, 인원 채용면접을 위해 미국 출장을 갔던 일, 다른 회사와 IT 인원을 이동시키는 준 M&A를 위해 출장을 가고, 사람들을 만나고, 간담회를 하고, 설득하고, 그런 일을 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강원지역의 병원 전산실을 통합하기 위해 원주로 출장을 갔던 일이다. 그 출장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다. 원주에 도착해서 담당자를 만나자마자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지고 일만 했다. 그렇게 첫날의 일을 마치고 같이 저녁을 먹는데 그 담당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여기는 참 느리죠, 지방이라 그런지..." 순간,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모른다. 일이 되게 하는 건 능력보다는 서로 간의 공감대인데, 난 그건 무시하고 액면 그대로 일로만 사람을 대했다. 그때의 그 느낌이 참 강렬했다. 나를 보면서 그 담당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저러고 사나...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런가 원주 병원의 전산팀 이관은 없던 일이 되었다.


당시 회사에서는 일반적인 인사업무를 넘어서 조직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조직문화팀이 만들어졌다. 몇몇이 모여서 그 일을 해야 하는데, 몇 달간은 서로가 멘붕이었다. 완전 맨땅에 헤딩을 하는 데,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열심히 정신없이 일에 빠져서 달리다가, 몇 개월 동안 멍한 상태가 되니 정말 혼란스러웠다. 팀 전체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표류를 하는 시간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그런 방황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일이었음을, 그래서 윗 리더도 그런 팀의 모습을 그냥 보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당시 인사 전체를 이끌고 있는 분은 참 깊이가 있었던 분이었다. 그분은 이미 그런 상황을 예견하고 지켜보고 있으셨음에 틀림이 없을 거다. 만약 다음에 그분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때의 일을 여쭤보고 싶은데, 기억이나 하실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조직문화의 업무는 혁신학교, 조직 활성화 프로그램, 조직진단, 전사원 설문조사 등등의 굵직한 일로 확장되어갔다.


그러고 나서 또 본부로 옮겨서 일을 또 한다. 본부에서 일을 할 때는 업엔 다운이 있었다. 너무 일이 하기 싫어서 힘들 때도 있었고, 너무 보람된 일이라서 행복하기도 했다. 채용을 진행하려고 여의도 쌍둥이 빌딩의 회의실 전체를 빌리는 바람에 다른 회사로부터 원망도 들었고, 승진 심사를 위해 하루 종일 곤지암에서 보내기도 했다. 본부의 조직문화 활동을 위해 몇 개월 어려운 보고서를 써내기도 했다. 참 다양한 일로 점철된 직장생활이었다.


그렇게 하는 동안 회사의 공식적인 일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코칭 봉사활동으로 KAIST 학생을 만나 코칭을 하기도 했고, 회사 내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개인비전을 찾아가는 Visionchampion이라는 이름의 그룹코칭도 진행했다.


그리고 굳은 결심을 하고 조직을 떠났다. 손뼉 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내가 박수를 받으면서 떠났는지는 자신이 없다. 지나고 보니 조금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을 보면 말이다. 퇴직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핵심은 2세 문제였다. 늦은 결혼이었지만 건강했기에 걱정하지 않았는데 많은 노력을 하고 많은 비용을 썼음에도 아무 결과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열심히 일을 했으니 이제는 좀 쉬자..라는 결론을 내고 과감히 사표를 제출했다. 그런데 내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퇴사를 하고 자유인이 되었음에도 학교 강의, 코칭과 컨설팅,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받지 못했던 교육들로 빈 시간을 채워나갔다. 


그렇게 일 년여를 보내고 다시 조직으로 돌아왔다. 고향인 부산에서 인사를 담당할 사람을 찾는다고 하기에 어떤지 궁금해서 지원했다가 그냥 일을 시작했다. 벌써 일을 시작한 지 3년이 넘었다. 처음 그 회사를 간다고 했을 때, 남동생이 이런 말을 하더라. "큰 기업에 있다가 그렇게 작은 기업에 가면 많이 힘들건대..." 남동생의 말대로 정말 쉽지는 않았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았고,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인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이상한 나라에 혼자 뚝 떨어진 것 같이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3년간을 보낸 이유는 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인사체계를 선진 기업의 수준까지 올려놓겠다는 말도 안 되는 욕심. 아직 기대하는 것과는 많이 멀지만 그동안 조금씩 조금씩 야금야금해왔기에 조금만 시간이 더 흐르면 어느 정도의 구색은 갖출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것은 그룹 전체의 인사체계를 정비해서 시스템화하는 일. 이 일이 끝나면 내가 원하는 모습의 50% 이상은 갖춰지니까 그 뒤에 무엇을 할지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거다. 무엇을 더 해야 할지, 그건 조금 더 시간이 가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할 일은 여전히 많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키운 많은 업무들 (1/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