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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행복코치 Aug 04. 2016

생각 없는 무모한 도전들(1/2)

내 삶에 들어온 많은 점들. 4편

생각 없다, 무모하다 그런 말보다는 이 말이 더 적합한 것 같다. 


"그냥 재미 삼아 한 번 해볼까?" 


그 단순한 생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있듯이 어설프게 시작한 시도가 나를 엄청난 고난의 길에 들게 하기도 했고, 큰 성장을 하게 하기도 했다. 크롬볼츠의 말처럼 인생이란 여러 가지 기회의 연속이고 그 기회를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자신의 삶에 중요한 계기로 삼는가가 중요하다고 했듯이 말이다.  


논문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다


가장 먼저 내가 잡은 기회는 교수님 논문 보조였다. 누군가는 겨우 그거?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일과 관련된 가장 첫 번째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또 다른 행운으로 연결이 되었다. 

지금은 거의 유래가 없지만 당시에는 석사학위를 가지고 박사 코스를 마치면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다. 기회를 잘 잡으면 전임강사를 할 수 있었는데 3년 2학기 때인 것 같다.  그분이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데 도움을 줄 학생을 찾고 있었다. 논문 주제가 의복 스타일에 따른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점검하는 것이라 의복 스타일에 대한 일러스트를 하는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러스트에 대한 기본기가 있어야 하고 많은 양의 일러스트를 빠른 시간 내 해내야 했다. 내성적인 내가 그렇게 해보겠다고 한 건, 그냥 내가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류학과는 방학 때 서울 학원에서 일러스트 강의를 듣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학원 수업을 듣고 어마어마한 숙제를 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같이 간 친구는 밤을 새우고도 못한 것을 나는 한두 시간에 끝내고 하숙했던 동네를 싸돌아 다녔다. 하루 종일 스케치북에 일러스트를 해대는 것이 나에게는 참 쉽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일러스트를 쉽고 빠르게 할 자신이 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도 교수실을 찾아가는 그 길은 참 두려웠다. 지금도 잘할 수 있겠다 싶어도 앞으로 잘 나서지 않는 내가 그때는 왜 그렇게 하겠다고 했을까.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었는지 모르겠다. 약 두 달 열심히 그려서 교수님의 논문을 쓰는 걸 도왔고 많지는 않지만 아르바이트 비용도 벌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4학년 2학기를 앞두고 LG전자에서 온 추천서에 내가 추천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합격을 하고 나서 인사를 갔더니 웃으면서 교수님이 이러신다. "이 학생이면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다"라고 내가 추천을 했다고. 그때 교수님의 일을 도와주지 않았으면 나는 그대로 하나의 얌전한 학생으로만 인식이 되었을 거다. 나와 친한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끈질기고 책임감이 강한지 알겠지만 조용하고 드러나지 않는 내가 어떻게 교수님에게 그렇게 인식이 될 수 있었겠는가. 


입사추천서 구경이나 해볼까? 


그리고 두 번째는 이 글의 첫 번째로 담긴 입사추천서를 작성해 보는 것이었다. 입사지원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금성사라는 곳이 어떤 회사 인지도 모르고, 설계실이 어떤 곳인지는 더더욱 모르고 단지 입사지원서를 써보고 싶어서 지원을 했다. 그런데 그게 지금까지의 나로 연결이 되었다. 


서울, 서울, 서울, 한 번 살아보자고!


세 번째는 서울 근무를 시작한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말렸다. 서울 근무 힘들다고, 많은 사람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내려왔다고, 가지 말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난 그냥 다른 도시에서 생활을 해보고 싶었다. 대학도 서울로 가고 싶었으나 결국 가정형편 때문에 접었는데, 이제는 월급을 주는 직장이 있는데 안될 것이 무엇인가 싶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원한 것도 아니고 서울 본사 부서에서 나를 콕 집어서 근무하겠냐고 물어보는 데 안된다고 할 것이 무엇인가 싶었다. 


당시 많이 답답했다. 창원이라는 곳이, 새로운 변화가 없이 그냥 정체되어 있는 회사의 모습이, 그리고 내 삶이 그냥 지방에서 끝나는 것도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울로 갔다. 모든 이들이 한 번은 살아보고 싶어 하는 서울 생활은 커다란 짐가방과 신림동 구석 반지하 사촌동생의 자취방에서 시작되었다. 1월 2일 첫 출근. 꽁꽁언눈밭을 네 발로 기면서 서울 본사가 있는 여의도 쌍둥이 빌딩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그 뒤의 생활은 말 그대로 눈물 콧물을 쏟는, 가끔은 웃음과 보람이 함께 하는 생활이었다. 서울생활은 석사학위와 연계가 된다. 이 것은 인사업무를 하기 위해 내가 해야 했던 필수 선택사항이었다. 


코칭이 뭐에 쓰는 물건인고?


네 번째는... 코칭 공부를 시작한 것.

코칭 공부는 내 삶을 바꾸었다. 지금까지 고슴도치처럼 가까이 오는 모든 사람을 뾰족한 침으로 마구 찌르는 모습이었다면 코칭을 배우면서는 스스로 침을 하나씩 빼버리고 보다 부드러운 모습으로 변화해 가는 중이다. 박사학위를 한 것도 코칭과 연계된 것이니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이라고 해야 할 거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코칭은  처음에는 아주 쉽게 쉽게 다가오지만 코칭을 잘 하기 위해서 필수조건은 코치의 인간 됨됨이다.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고 타인의 어려움에 대해 이해하고 아주 투명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답을 찾고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주려면 코치 스스로가 아주 투명한 거울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남은 길이 많고 또 해야 할 것이 많다. 


누군가는 그렇게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길을 왜 가냐고… 그냥 천성인가 보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기를 바라듯이 그런 사람이 되어 보는 것도 좋은 인생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코칭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풀고, 이쯤에서 정리하자. 코칭은 내 인생에서 늘 현재이고 미래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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