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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행복코치 Feb 24. 2016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다

갑자기 박쥐가 된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근무하게 된 설계실은 일반 사무실과는 달리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처음 들어가서  어리바리하고 있는 나에게 많은 사람들  다가왔다. 첫 번째는 설계실장님. 두 번째는 사무실의 언니들, 세 번째는 설계실의 남자 사원들이었다. 지금도 별로 사근사근하지 않은 성격인데 그 당시에는 워낙 내성적이라 사람들이 다가오는데 힘들었을 거다. 그럼에도 그 당시의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재밌냐고 농담도 던져줬던 분들에게 감사한다.


설계실장님의 훈시, "이제부터 너는 여사원도 아니고 남사원도 아니다."


설계실장님은 첫날 나를 불러다 놓고 몇 가지를 전달하셨다.

첫째, 너는 지금부터 여사원도 아니고 남사원도 아니다. 설계실에 여사원이 있는데 그 들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키면  안 된다. 그 들과 함께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너는 대졸사원이니 남사원과 똑같이 일을 해야 한다.

둘째, 치마 입지 마라. 여기는 공장이고 생산라인이 바로 옆에 있다.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는 여사원은 치마를 입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무실에 근무한다고 치마 입고 꾸미고 그렇게 다니지 마라.

셋째, 너희 학교 선배가 3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너도 그러면 다시는 너희 학교에서 사람을 뽑지 않을 거다.

그 외에 다른 이야기도 하신 것 같긴 한데 일에 대한 건 다 잊어먹었고 남은 게 이 정도다.


금성사 창원공장은 80년대 말 심각한 노사분규를 겪은 곳이다. 노조가 사무실을 점령하고 제품을 던지면서 항거하는 등 대표적인 노동운동의 장소였다. 그렇게 어려운 시기를 겪고 난 뒤 극적으로 쟁의를 끝내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노사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중 하나가 사무실 사람들도 생산라인에 근무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복장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무실 여사원들에게도 업무시간에는 치마를 입지 말라는 규정이 있었다.


첫날 이야기를 들으면서 실장님의 말 중에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남사원도 아니고 여사원도 아니다"하는 말이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조금 시간이 지나니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당시 설계실 근무자는 약 130명 정도,  그중에 120명 남짓이 남사원으로 연구원이라고 불렸다. 대부분 공대를 졸업하고 제품 설계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15명 정도가 여사원인데 설계실 내 부서마다 한 명 꼴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역할은 사무보조 업무로 보고서 타이핑, 부서 비용처리 등의 단순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입사할 때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둔다"는 서약을 하고 입사를 했다고 한다. 내가 근무했던 기간 동안에도 결혼과 동시에 퇴사를 하는 일이 빈번했다. 하지만 이들을 허투루 보면 안 되는 것이 대기업에 입사하려면 상업계 고등학교 중 최고의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야만 입사를 할 수 있었으니 어떤 사정으로 상업계를 갔을지언정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남사원이 입사하면 선배들이 하나같이 하는 조언이 "여사원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였고,  입사하자마자 남자 신입사원들은 여사원을 대상으로 신고식을 하는 게 당시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바로 나 같은 사람이 입사를 했으니... 겉모양은 여사원이니 여사원이 하는 일을 함께 해야 했고, 또 배운 건 있으니 남사원과 같은 프로젝트를 해야 했다. 지금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출신이나 학력에 따라 제한이 되지 않는데 당시는 그랬다. 대졸사원과 고졸사원이 하는 일이 구분되어 있었고, 남녀에 따라서도 해야 하는 일이 나누어졌다.


설계실장님이 걱정했던 것은 내가 여사원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당시 설계실 여사원들은 기강이 센 편이었다. 설계실의 일이라는 게 다른 부서처럼 되돌이표가 돌듯이 같은 업무의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일이 발생하는 곳이었고, 그래서 차짓 잘못하면 사고가 발생하는 곳이었다. 설계를 하는 부서인만큼 다른 부서에 비해서 전문적인 내용도 많이 알아야 했다. 내 선배도 여사원들과의 관계가 원할하지 않았다는 주변 이야기가 들리는 것을 보니 그게 계기가 되었고 실장님이 걱정하신 내용이었다. 


출근한 그날 바로 설계실의 왕고참 언니로부터 해야 하는 일을 할당받았다. 설계실 부서의 책상을 닦는 일, 책상 위 재떨이를 비우는 일,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그런 일이었는데, 커피 심부름도 포함이었다.


왕고참 언니의 업무분장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을 수는 없었다.

'내가 이따위 일을 하려고 회사에 들어왔나, 실장님이 기존 언니들하고 잘 지내지 못하면 가만 안 둔다고 했기에 이렇게 하는 거지, 시간만 좀 지나 봐라. 내가 가만있나..' 꿍시렁 꿍시렁.. 솔직한 심정이었다.


거창하긴 하지만 "생존"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하다


여기서 조금 거창하고 이른 감도 있기는 하지만 "생존"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난 설계실이라는 세계에 들어왔고, 이 기회를 어이없게 팽개 치고 싶지 않았다. 내면의 자존심이란 녀석이 들어온지 며칠 되었다고 벌써 나가겠다고 하냐고 비아냥 거리고 있었다. 또 하나는 앞서 3개월도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던진 선배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일단 어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호기심도 생겼다. 여사원과의 일은 일이고, 내가 과연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걸까 하는 궁금증가 호기심이 머릿속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여우를 죽인다고 이렇게 시작한 직장생활이 벌써 20년을 훌쩍 넘었다.


그리고 이유가 한 가지 또 있었다. 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 우리 집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아주 고된 일을 하셔야만 했다. 일주일에 겨우 하루 집에 오는 일,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 그 일을 하셨었다. 그런데 내가 이 정도의 일을 못 견뎌서 집으로 달랑거리고 돌아간다는 건 생각할 수 조차 없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엄마에게  그때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중간에 그만두면 나중에 나와 남동생이 힘들다고 그만두려고 할 때 엄마로서 할 말이 없어서 이를 악물고 견디셨다고.. 엄마의 모습은 직장생활 내도록 힘이 되기도 했고 또 반면에 어깨의 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결과적으로 인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셨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렇게 정글 같은 직장생활은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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