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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행복코치 Mar 01. 2016

뭔가를 하고 있다면 보고서로 증명하라

사회 초년 시절에 배운 것들 (1)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예전에도 보고서는 업무상 중요한 절차다. 보고서가 없으면 무슨 일을 했는지  증명되지 않고, 보고서가 없으면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사전 포석이 중요하기에 여러 관련자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달해 놓아도 결국 최종 결정은 보고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지금은 연간 사업계획에 대한 보고서, 프로젝트 전체 진행에 대한 보고서도 스스로  써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지만 처음부터 그랬을 리는 만부당한 일이다.


세탁기 성능시험 보고서를 쓰라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단이 났다. 세탁기설계실에 신입사원이 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세탁기 성능시험이다. 세탁기를 새로 개발하면 기존 제품과 비교해서 얼마나 성능이 좋은지를 테스트해야 한다. 실험실에 세탁기 몇 대를 세워놓고 시험용 세탁물에 오염포를 붙여놓고 세탁을 한 후 오염이 얼마나 제거되었는지를 확인한다. 짧으면 일주일, 길게는 반달정도 세탁기로 빨래만 한다. 처음 입사한 신입사원은 아는 것이 없으니 이런 일을 하면서 일단 세탁기와 친해져야 하는데, 내게도 역시 그 일이 맡겨졌다. 단순노동, 생각보다 시간도 잘 가서 일주일이 후딱 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보고서를 쓰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보고서를 어떻게 쓰는지 배웠어야 말이지... 학교에서 리포트를 쓰듯이 표지도 이쁘게 만들고 결과보고서를 서론 본론 결론으로 장문으로 써서 제출했다. 그 보고서를 보는 설계실장님의 얼굴 표정이란... 그때 나에게는 흔히 말하는 멘토나 사수도 붙어져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하여튼 황당한 표정이었다가 나중에는 그냥 웃기만 하시더라. 그러면서 보고서는 이렇게 쓰는 거라 가지고 있던 보고서를 보여주시는데, 이건 완전 신세계인 거다. '~습니다', '~읍니다'가 아닌 , '~음', '~임,으로 딱딱 끊어지는 회사 보고서를 처음으로 손에 들고 살펴봤다. 아, 이렇게 쓰는 거구나... 그 보고서를 앞에 두고 실장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곱 번 다시 쓰다


그렇게 해서 잘 알아들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때부터 일곱 번인가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계속 썼다. 저번에는 이게 틀렸고, 이번에는 이게 틀렸단다. 내가 보기에는 이거나 저거나 같아 보이는데 같은 게 아니란다. 요즘에는 보고서도 컴퓨터로 작성하니 수정사항이 있으면 그 부분만 수정하면 되지만, 당시에는 보고서는 모두 손으로 써야 하는 했고, 보고서를 다시 작성한다는 건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함을 의미했다. 

"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의 일본직장경험기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중에 일본에서 직장생활 경험을 쓴 "두려움과 떨림"을 보면 하루 종일 같은 일만 반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스스로 바보가 아닌지,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고민하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꼭 내가 그 심정이었다. 내가 이렇게 같은 것을 반복하면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어쨌든 일곱 번째인가 보고서에 실장님의 사인이 남겨졌고, 그게 공식적인 내 첫 보고서가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실장님이 보고서를 그렇게 계속 보류를 시킨 것은 일종의 테스트이자 교육방법이었다. 보고서를 다시 쓰면서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법, 화를 참는 법,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는 법 등등 직장생활에서 필요한 몇 가지를 속성으로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보고서를 계속 다시 쓰는 걸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언제까지 어떻게 하나 보자.. 그랬을 수도 있겠다. 혹시나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에 손을 들었던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하긴 그 당시에 나 스스로도 직장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시간들이었지만 이 시간은 3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보고서 작성 능력을 키워준 사건들


첫 보고서가 그렇게 통과되고 나서는 실험보고서 쓰는 것은 익숙해져서 오류나 오타가 아닌 이상 다시 작성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 뒤에 서울에서 창원으로 발령받아 내려온 생애 첫 팀장에게서 지금까지 썼던 세로 보고서가 아닌 가로로 된 멕킨지 보고서 쓰는 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어느 정도 보고서 작성을 잘 한다고 생각하던 시점에 보고서의 방향과 논리에 대해서 설계실의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두 시간을 서서 야단을 맞으면서 다시 심사숙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리 시절 프로젝트 팀장이 되면서 문제 해결 방법론과 논리적인 보고서 작성법을 배우면서 보고서 작성 능력은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요즘도 팀원들이 만든 보고서는 마음에 잘 들지 않는다. 체계도 맞지 않고, 논리도 엉성하다. 폰트나 글자 간격, 줄 간격이 맞지 않는 것은 바로 눈에 들어온다. 당시 보고서를 쓸 때 각 페이지간의 논리도 중요하고 페이지의 디자인도 매우 중요했다. 글자의 위치, 폰트의 종류, 각 글자의 위치 등도 지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보고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완전 하드 트레이닝으로 배우다 보니 요즘의 자유분방한 보고서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어찌 보면 너무 엄격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게 내가 살아왔던 방식이고 내제 된 능력이니 어쩌겠는가..


이렇게 난 서서히 조직 인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다음 이야기는 직장이라면 빠질 수 없는 회식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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