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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행복코치 Mar 05. 2016

회식, 근무시간의 연장 혹은 개별 관계의 시작

사회 초년 시절에 배운 것들 (2)

직장생활 이야기에서 회식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직장생활에 대한 정확한 정보 없이 입사를 하고 나서 가장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던 건 회식이었다. 대학 때에도 술을 많이 마시고 다녔던 것도 아니고 여학생만 있었던 과 특성상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고 다닐 일도 없었다. 그래서 술 마시는 예절이 어떤지,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지도 전혀 몰랐다. 그래도 하나 다행이었던 건, 술 좋아하는 아버지 덕분에 술에 대해 꽤  익숙한 편이라는 점이다. 술에 대해서 많이 안다는 게 아니라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았다는 거다.


회식 참여자의 기본자세


회식은 분명 업무시간이 아님에도  업무시간과 유사한 법칙이 지배하는 업무 아닌 업무 같은 시간이다.


처음 회식에 대해 내게 설명해준 분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정식적인 교육이 아니라 회식 중 알딸딸한 상황에서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첫째, 절대 중간에 도망가지 마라. 도망가면 역적이다. 

이 이야기 때문에 난 설계실에서 가장 나중까지 남아있기로 유명해졌다. 요즘도 어리바리하지만 그때는 영락없는 초보니 선배가 하는 이야기는 철떡 같이 지켜야 하는 줄 알았다.


둘째, 회식 다음날 지각하면 죽음이다.

아무리 회식에서 짱꼴라가 되어도 다음날 아침 출근시간에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 얼굴도장을 찍고 나서 화장실에서 변기를 안고 사랑을 하던 공장 구석에 찌그러지던 아침 출근시간에는 반드시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한다. 


셋째, 어떤 상황에서도 주는 술은 마시라. 그냥 마시고 죽어라.

회식에서 마시는 술은 다양했다. 소주는 기본, 맥주와 가끔은 양주도 등장했다. 가장 심했던 것은 설계실장의 신발을 잔 삼아 모든 사람들이 돌려마시는 것. 어떻게 했냐고? 그냥 상상에 맡긴다.


혹시 아직 이런 회식문화가 있는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고생하시는 분들이나, 개인적으로 즐기시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요즘에 이런 회식을 하겠다고 한다면 아마 페이스북에 도배가 되지 싶다. 요즘도 이런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회식문화가 있다고..


솔직히 말하면 나도 야만적이라고 하는 저 회식문화를 꽤 즐기기도 했고, 지금도 가끔은 그립기도 하다. 그리고 요즘에도 아주 가끔 저런 분위기로 이끌기도 한다. 물론 예전 팔팔할 때와는 달리 지금은 저런 회식을 한 번 하고 나면 다음날은 그냥 좀비가 되니 흘러가는 시간에 따른 노화가 눈물 나게 안타까울 뿐이다.


신기한 세상, 회식이라는 세상


직장에 들어와서 참석한 회식은 참 신기했다.


가장 좋았던 건 내 돈 내지 않고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회사에 들어와서야 횟집에는 아나고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고 중국집에는 짜장면 짬뽕을 손바닥만 한 그릇에 주는 코스요리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일식집과 횟집이 어떻게 다른지, 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아내리는 쇠고기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몇몇이 모이거나 단체가 모이거나 공통적인 주제는 회사와 상사에 대한 험담이었다. 처음 참석한 회식에서 모든 사람들이 회사가 이러니 저러니 하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았다. 저렇게 싫은 회사를 왜 다닐까, 내일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다음날 아침 말짱하게 출근해서 일을 하는 모습에서 일반적인 회식의 모습임을 겨우 깨달았다. 물론 나도 나중에는 회사와 상사를 안주거리 삼아 열심히 씹었지만 말이다.


회사에서 부장님, 과장님이라 불리지만 회식장소에서는 어김없이 선배, 형, 오빠, 동생이 되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도 회식장소에서는 어깨동무를 하고 밤거리를 비틀거리며 쏘다녔다. 그렇게 한 두 번 회식을 하다 보면 모두 다 한가족이 된다. 직장에서 일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 것보다 회식에서 옆자리에 앉아 잔을 부딪치면서 하는 한마디 한마디, 각자의 고민들이 훨씬 쉽게 그 사람을 알고 이해하게 해주었다. 같은 사무실이라는 공간에서 일하는 동료가 아닌 그냥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회식이 업무시간이 아니지만 업무시간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많은 정보들이  회식장소에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는 상사가 좋아하는 보고 스타일, 버릇 등등의 직장생활을 잘할 수 있는 깨알 정보부터 승진, 부서이동에 대한 결과나 부탁, 청탁 등등도 공공연히 오고 갔다. 몇 년이 흐른 뒤 내가 팀을 옮긴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것이 회식장소였다. 


같은 조직에 있으면서도 하는 일에 따라서 회식 때의 모습도 달랐다. 


설계실에는 다양한 부서가 있다. 세탁기 외관 설계를 담당하는 부서, 성능을 시험하는 부서, 세탁기를 구동하는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부서.  각 그룹마다 회식 분위기가 달랐다. 그중 단연 극과 극의 모습을 보이는 부서는 외관 설계부서와 소프트웨어 부서였다. 세탁기 외관을 설계 담당자는 대부분 기계설계학과나 전기공학자 들이었다. 공대생의 특성처럼 투박하고 강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와는 반대로 세탁기를 구동하는 소프트웨어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전자계산학과로 조용한 성향이 많았고 회식으로 술보다는 차를 마시거나 함께 영화를 보는 형태를 즐겼다. 설계실 전체가 회식을 하는 날이면 그 들의 모습은 극과 극의 모습이었다. 외관 설계 부서가 모인 곳은 상다리가 하나 부러지던가 두 사람이 치고받고 뒹굴거나 하는 야단법석의 모습이었고 소프트웨어 쪽 부서는 조용히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몇 번의 회식을 통해 배운 깨알 생존비법


이렇게 몇 번의 회식을 치르면서 어떻게 하면 회식에서 생존할 수 있는지 비법을 배워나갔다.


일단 주는 술은 모두 받아마시는 척을 해야 한다. 처음에는 정말로 받아 마셨다. 선배가 주는 술은 권력이었고 당시에서는 신입사원의 긴장과 그리고 젊음이 있었으니까... 술은 마시면 는다고 그때 술이 엄청 늘었다. 지금의 술 실력은 그때 다 길러졌다. 

과장으로 팀을 이끌고 있을 때 멋모르고 도발했던 주당 대리 한 사람을 찍 소리 못하게 꺾어버린 것도 이때 길러진 실력이다. 고맙게도 그때 꺾어버린 대리가 알아서 "주신"으로 소문을 내줘서 그 후 어느 누구도 감히 내게 도전하는 자가 없었다.  

멋모르는 여자 신입사원이 열심히 술잔을 비우고 있으니 불안했던지 상사 한 분이 상 밑에 대접 하나를 주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셨다. 거기다 술을 눈치껏 비우라는 소리다. 덕분에 술을 눈치껏 받아 마시는 법을 배웠다. 술을 마시는 중간에 물을 많이 마시면 술이 덜 취한다는 것도 배웠고, 분위기가 서로 어깨동무하고, 술잔이 날아다니는 등 너무 과열되면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도 방법임도. 모두 다 선배들이 알려준 방법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건 언제 어디서든 정신 빠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술을 마시고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어지는 것은 꼴불견이다. 그리고 특히 스스로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하는 건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이라면 당연한 태도다. 술은 긴장을 풀어주고 사람 사이의 간격을 줄여주는 순기능도 있지만 이성을 잃게 만드는 역기능도 있다.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에 대한 가장 쉬운 대응은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거다. 상대방이 술을 마시고 고주망태가 될지언정 나는 정신을 말끔하게 지키고 있어야 한다. 비록 혀가 꼬이고 눈이 게슴츠레 해져도 말이다. 그래서 인가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몇 번 경험했던 난감한 순간을 잘 넘기지 않았나 싶다.

남자들에게는 용납이 되는 일도 여성이 하게 되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참 억울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조심하는 게 상책이고 만약 발생한다면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회식, 적당하기만 하면 힘든 업무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고 또 사람들 간에 쌓인 긴장을 풀고 의기투합하는 좋은 자리다. 직장 초년병 시절 1차 정규회식, 2차 가라오케, 3차 맥주, 4차 선술집에서 한 잔 더 그리고 마지막 새벽 어스름 즈음에 포장마차에서 먹은 뜨거운 가락국수까지. 이렇게 밤새워가면서 회식을 하고도 거뜬히 출근해서 일을 했다. 직장생활이 어렵기는 했지만 아직 초보라서 책임질 것은 별로 없는 몸이 가벼운 시절이라 가능하지 않았을까..


요즘은 예전처럼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지도 권하지도 않는다. 간단하게 1차 만을 하고 끝나는 회식이 보편적이다. 일과 생활의 균형을 생각하는 문화도 확산되어 바람직해진 것은 사실이다. 옛날 방식의 회식문화를 꽤 좋아하긴 했지만 요즘의 나도 적당히 마시고 적당한 시간에 헤어지는 회식을 선호한다. 술을 마시는 회식보다는 함께 이야기하고 웃고 떠드는 회식을 더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가끔은 새벽까지 선배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새벽을 맞이했던 때가 그리운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중고 사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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