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 Jun 11. 2024

너의 발로란트, 나의 테스타마타

게임과 와인 그 너머에

나는 대학생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주종불문 다 잘 마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소주는 여태 못 마신다. 중국술도 위스키도.. 여전히 나에게는 어렵디 어렵다.

다행히 맥주와 와인은 너무 맛있다. (얼마나 다행인지 ^^;;)


"사실 난 술을 좋아한다기보단 술자리가 즐거워"

내 평생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수도 없이 봐왔다.

심지어 알쓰 친구들이 콜라와 사이다로 과음? 하면서 주당들을 따라 3차까지 가는 것도 종종 목격했다.


단언컨대, 나는 술자리보단 술이 좋다.

그래서 맛있는 와인을 맛보았을 때, 내 입맛에 딱인 수제맥주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나는 술이 좋아서 술자리에 가지만, 누군가는 술자리가 좋아서 술을 마신다.

나도 이해되고, 누군가도 이해가 된다.


중2 아들이 하고 싶은 게임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폰으로는 할 수 없는 게임이란다.

발로란트?

왜 그 게임이 하고 싶은지 물었다.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게임인데, 친구들은 다 한다고.

자기도 친구들과 그 게임을 해보고 싶은데, 노트북이 있어야 한단다.

보자. 아들의 노트북은 몇 달 전에 내가 던졌... 이 얘긴 다음에 하겠다.

암튼 그 게임을 허락한다 해도 노트북이 없음으로 나는 번뇌에 잠겼다.

오오오!! 빛나는 모성애란 바로 이런 것인가!!??

마침 재택인 경우 사용하는 내 노트북이 보였다.

이 게임을 하기 위한 방법을 검색하고 뭐에 가입하고 에픽 런처 깔고 게임 다운로드하고 뭐 인증하고...

아이가 학교 간 사이 무려 2시간에 걸쳐서 발로란트를 까는 데 성공했다.

그 2시간 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술자리가 좋아서 술약속을 잡는 그 사람들처럼 내 아들도 친구들과 함께 소통하며 놀고 싶어서 이 게임을 하고 싶은가 보다. 게임이 너무 하고 싶어서 친구들을 모으는 건 아닐 터.

그렇게 이해하고 나니 기말고사를 고작 3주 앞둔 이 중요한 시기에도 흔쾌히 게임이 허락되었다.


친구들과 온라인으로 신나게 작전을 짜면서 게임을 한 지 2시간이 지났고, 어느 순간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이후로 또 한 시간이 흘렀고, 게임 4시간째....

- 아들! 뭐 해? 아까부터 조용하네?

- 아.. 친구들은 공부해야 한다고 아까 다들 나갔어요.

- 어?? 그럼 넌 혼자 뭐 하는데??

- 아.. 모르는 사람들과 팀을 이뤄서 하고 있어요.

- ...............................................

  이 시퀴가!!


친한 친구들과 소통하는 그 시간이 좋아서 게임을 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다.

우리 아들은 그냥 게임이 좋았던 거다.

내가 술자리보다 술을 좋아하는 것처럼?

얼마 전에 와인 비비그라츠 테스타마타를 처음 마셔봤는데

와! 진짜 너무 맛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 한 병을 다 마시고 싶을 만큼,

아들에겐 이 게임이 그랬겠지.


나는 갱년기 엄마치고는 아들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고,

무엇보다 엄청나게 관대한 것 같다.

자꾸만 영화 300의 크세르크세스의 명대사가 맴돈다.






이전 03화 공정하다는 착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