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학교에서 근무할 때였어. 법인 이사회의 의중에 심하게 휘둘리며 갈팡질팡 하는 관리자가 있었어. 교사들 사이에서 신임도 두텁고 멋진 교육 경력도 가진 분께서 뭐가 아쉬워 그러는 건지 이해를 못 했는데 알고 보니 나와 같은 평교사에게는 조금 먼 이야기지만, 보직 교사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으면 알게 되는 다른 세상이 있다더라고. 이 학교의 보직 교사 출세 루트는 대략 이랬어. 보통 첫출발은 3학년을 제외한 학년부장으로 발탁되는 거야. 그 후 교육지원부나 인성교육부, 창의체험활동부 등의 부장을 거쳐가지. 여기까지는 평교사에서 나이나 연차가 조금 차오른 분 중 부장 교사에 대한 의사가 있다면 대부분 도달할 수 있는 분위기야. 그다음은 보통 행정 1,2 부서라 불리는 연구부나 교무부의 부장이 되는 건데 이곳부터는 조금 달라져. 여기가 관리자로 가는 길의 초입이라 하더라고. 연구부장, 교무부장 자리에서 몇 년 머무르신 분들이 교감이 되고, 잘 풀리면 교장의 자리에 오른단다.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내가 경험한 공, 사립학교는 대체로 저런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어.
그 밖에 공립학교에서는 교육 행정가가 되어 본청이나 지원청의 고위직으로 가시는 분, 혹은 대학 교수가 되는 분도 계시더라. 사립도 이와 비슷한데 한 가지 루트가 더 있어. 이사나 감사로서 학교 법인 이사회의 임원으로 임명되는 경우야. 이 학교의 관리자들은 아마 이사회 임원이 되는 걸 가장 아름다운 해피 엔딩으로 여기는 듯했어. 언젠가 교장으로 퇴직하신 분이 법인 이사회 이사가 된 경우 봤어. 이사가 되어 이사회 정기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학교에 온 전 교장의 방문은 흡사 금의환향 분위기였지. 그분을 우러러, 내지는 부러워 바라보는 몇몇 분들의 반짝이는 눈빛도 봤고.
이 학교 임용 첫 해에 학교 건물 준공식이라는 걸 했어. 건물 외벽과 노후한 공간 일부를 리뉴얼했고 강당을 포함한 특별실 위주의 신관 건물을 새로 지었거든. 행사 분위기가 전에 근무했던 학교들과 사뭇 달랐어. 보통 학교에서의 행사라면 학생, 학부모, 교직원, 지역사회 주민 등이 주체가 되잖아. 여긴 학교 재단 소속의 기업들이 많은 편이라 그런지, 프로페셔널한 홍보 대행사가 준비하는 준공식 느낌이랄까. 얼핏 들었는데 식 시작에 본관 1층에 레드 카펫을 깔고 테이프 커팅식을 한다고 했어. 그 말을 듣고 이례적이라 좀 놀랐지. 준공식 안내 브로슈어와 홍보 영상도 제작했는데 담당 교사가 엄청 고생했다고 해. 위에서 자꾸 수정을 요구해서 최종, 최최종, 진짜최최최종 파일이 무척이나 쌓였었다고 하더라. 준공식 며칠 전에 운동장에 큰 트레일러트럭이 와 있길래 뭔가 했더니, 신축 강당을 꾸미기 위해 풍선과 대형 천막, 리본 등의 장식으로 행사 공간을 어레인지 하는 업체라더라. 이런저런 준비의 스케일이 생각보다 커서 행사일까지 학교 이곳저곳이 조금 어수선했던 것 같아.
행사를 담당하는 부서에 소속되지 않아도 큰 행사를 할 때는 교직원 모두에게 업무가 주어지잖아. 전교생 체육대회 때와 비슷하달까. 준공식 때 담당 부서 소속이 아니었던 내게 분장된 업무는 귀빈 동선 안내 및 에스코트였어. 명단을 살펴보니 학교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여교사 4명을 배정해 놨더라고. 그런데 업무 분장표를 다시 자세히 보니 업무명 아래 괄호를 치고 '코르사주 담당'이라고 쓰여 있더라.
"코르사주 담당...? 이건 뭔가요?"
코르사주가 뭐였더라.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단어라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었어. 그러다 그때 결혼 준비를 시작해야 하나 싶어 인터넷을 기웃거리곤 했는데 어디선가 신부 부케랑 신랑 코르사주(부토니아)를 봤던 게 생각난 거야. 정장 재킷 가슴 부분 주머니에 넣거나 옷깃에 부착하는 작은 꽃다발 있잖아. 담당 부장은 안 그래도 분주해서 이미 혼이 반쯤 나가 보였어. 자세한 설명은 못 들었고 시간에 맞춰 행정실에 가면 된다고 해서 갔어. 역대급으로 분주해 보였던 행정실에 가서 테이블을 보니 전체 조회 때 연단에서 아이들 상장 수여를 위해 사용한 넓은 트레이가 있더라. 그날은 상장 대신 코르사주가 들어 있었고. 행정실 선생님께 코르사주 담당의 전말을 들었어. 행사 시작 전까지 행정실 근처 이사장 실에서 하하 호호 웃으며 다과회를 하고 계신 귀빈에게 가서 정장 상의에 직접 코르사주를 달아 드리는 거였어! 맙소사.
임용될 때 이후 두 번째로 이사장실을 들어간 것 같다. 어르신 열댓 분이 계셨던 것 같아. 나도 귀빈으로 오신 그분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분들도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았어. 이사장의 의전을 위해 개인 수행 비서 분들도 몇 분 계셨기도 해서 그런지, 타칭 VIP 분들은 우리가 이 학교 교직원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지. 동료 교사들과 난감한 눈빛을 나누며 소파에 앉아 차를 드시는 분들께 하나 둘 코르사주를 전달해 드렸어. 푼수 같은 행정 실장이 '온샘, 아이아이. 드리지 말고 이렇게 달아드려야죠.'라면서 우리에게 코르사주라이팅을 했어. 그때부터 꾸준히 난 행정 실장과는 안 맞았던 것 같아.
코르사주의 순간은 넘겼어. 아니 그냥 넘어간 거지. 진짜 여긴 어디, 나는 누구의 상태로 멘탈이 탈탈 털렸지. 그때는 찍소리도 못했어. 준공식 이후 있었던 개교기념식(이 학교 개교기념식에는 초대가수도 올만큼 엄청 성대하게 해.), 졸업식까지. 그 학년도의 행사 때마다 여교사 4인은 붙박이 코르사주 담당이었어. 순간은 짧았지만 자괴감은 유구하더라. 당시 교무부장은 불통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이라 교무부 기획 선생님께 행사 업무 분장에서 '코르사주 담당'의 불쾌한 부분을 아주 소심하게 말씀드렸어. 다음 해에 업무 명칭은 미묘하게 바뀌었지만 귀빈 이동 동선을 안내하고 에스코트하기 위해 가면 어김없이 있더라. 잘난 코르사주들.
얼마 뒤 교육계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반의 성 인지 감수성이 높아지며 어린 여교사를 향한 코르사주 타령은 자연스럽게 사라졌어. 체제에 순응하며 사는 척하기 위해 모범생의 가면을 너무 오래 쓰고 있었던 비겁자인 난, 그 찝찝하고 불쾌한 순간에 '아닙니다.' '싫습니다.'를 제대로 말하지 못했어. 임용된 지 얼마 안 되었기도 했던 건지, 뭐든지 잘 해내고 싶었던 자아가 스스로를 속이는 중이었나 봐. 코르사주 달기, 그것마저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동료 선생님들과 트레이에 놓인 코르사주의 방향을 정리하고 동선을 나누고 있었던 바보 멍청이 나. 심지어 한 교사가 '코르사주 담당도 예뻐야 할 수 있는 거야.'라는 망언도 하셨어. 그 말을 듣고 난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가끔 친구나 친인척의 결혼식을 가면 양가 부모님들의 가슴에 달린 코르사주를 보고 흠칫 할 때가 있어.
몇 년이 흐른 지금의 나는 만약 그 때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저는 코르사주가 싫어요.'라고 말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