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걸어가신 선생님들의 발자국 따라 걷기 #1
하루에도 몇번 씩 접속하는 업무포털. 학기 초에 올라오는 공문의 제목을 훑어보며, 너도 이제는 대충 감이 오지? 올해 본청과 지원청에서 주력하는 사업이 무엇일지가 말야. 제목에서 비슷한 의미를 가진 키워드가 계속 반복 되잖아. 창의인재, 세계시민, 한 학기 한 책 읽기, 4차 산업혁명, 미디어 리터러시, 마을교육공동체, 고교학점제 같은 것 말야.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교육 기조와 방향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교육계의 탑다운 방식의 사업 전개의 역사는 유구한 만큼 긍정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이라는 것에 동의해. 근데 손바닥 뒤집듯 자주 바뀌는 교육 아젠다로 균형 잡기가 어렵다고 느낀 적이 있었어. 참 좋은 사업이었는데 예산 부족으로 금방 사라지는 1회성 프로그램도 많고. 나중에는 학교 상황에 맞는 프로그램에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도록 본청에서 연간 교육 사업의 개요를 간략히 정리한 문서를 작성해서 새학기 전에 미리 공지해주는 것으로 바뀌었지. 공문의 홍수를 막고 학교별로 분산해서 지원해서 보고서와 계획서의 남발도 줄여줬어.
이건 그러한 합리성이 발휘되는 세상에 도달하기 전, 조금 과거의 일이야. 내가 보기에 그 해 업무 포털의 슈퍼스타는 '장학' 같았어. 새학기부터 본청과 지원청에서 장학에 대한 공문이 속속 도착했지. 안그래도 학교 평가 항목에 동료 장학, 자율 장학 처럼 학교에서 자체로 시행하는 장학의 횟수가 들어가던 시절이었어. 대부분의 교사가 1년에 한번씩은 수업을 공개하고 서너번 동료의 수업을 참관하고 있었어. 그러한 상황에서 올해는 대대적인 컨설팅 장학을 하게 되었지. 학교 대표 컨설팅 장학을 어느 교과에서, 어느 부서에서, 어느 사업에서, 어느 교사가 주도해야 하는가. 결정의 조건은 '어느 교사'에 정조준 되었어. 그럼 사업도, 부서도, 교과도 저절로 정해지는 거니까.
패자가 어느 정도 정해져있는 폭탄 돌리기가 시작되었어. 째깍째깍 거리며 지금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 폭탄은 소수 교과이자 기간제 교사이자 심지어 막내 라인에 속하던 내 발밑에 멈췄어.
'우리 학교의 비전과 철학을 고민한 뒤, 장기적으로 가장 필요한 영역에 컨설팅이 필요한 거 아닌가?'
아니. 이건 처음부터 진정성을 갖추고 몰두해야 할 그런 일이 아니었어. 그냥 새 학기의 균형을 무너뜨릴 초대형 폭탄일 뿐인거지. 온선생 참 순진한 소리 한다며, 그렇게 입바른 말 누구는 못하냐며. 진심을 드러냈을 때 대번에 초라해질 수도 있겠다 싶었어. 말을 아껴야 할 때임을 알았어. 다행히 잘못하면 속된 말로 누군가를 멕이는, 그러니까 누군가를 콕 집어 말하는 저격성 멘트가 되어 학교 구석구석 배달 될 수 있음을 깨달을 만큼의 사회적 지능은 갖춘 상태였어.
그래도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어. 건네줄 곳이라고는 나처럼 웃는지 우는지 모르겠는, 참 어설픈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또래의 동료들 뿐이더라. 그래서 하겠다고 했어. 언젠가 또 나타날 대형 사업, 혹은 폭탄을 거절할 수 있는 티켓을 하나 적립해 놓는다는 얕은 셈도 해보았어. 그래 한번 되어보자. 폭탄해체전담반.
컨설팅 장학을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과도한 페이퍼 워크가 커서 그랬던 것 같아. 사전 보고서, 의견서, 계획서, 현황 보고서, 결과 보고서, 회의록 등등. 머릿 속을 둥둥 떠다니는 단어를 불러다 앉힌 뒤 어르고 달래서 구절과 문장으로 예쁘게 묶어 흰색 평면에 배치 했어. 도표, 그래프, 그림과 사진들과는 그리 친하지 않았지만 글씨로 빽빽한 보고서 중간 중간에 넣어 억지 율동감을 주었지. 보고서 작성의 과정도 창작의 고통이 엄청나잖아. 대체로 개조식으로 작성하는 보고서 글투에 절여져서 '밥 먹기'도 '양질의 영양분 섭취로 고열량 에너지 습득' 같은 한자어를 남발하는 번역 AI 가 된 것 같았어. 한 동안 문서 업무에 허덕이고 있는 나를 부장이 급히 불렀어. 교장이나 장학사 급의 장학위원장은 내정되어 있지만, 장학 위원은 내가 직접 섭외해야 한다며. 자신은 발이 좁고 해당 업무의 문외한이라.
아직 울 때는 아님을, 너무 바쁘면 오히려 각성 상태가 되서 정신이 무한대로 맑아지잖아. 생각보다 두뇌 회전이 빨랐어. 진짜 한 순간에 떠오른 멋진 분이 계셨어. 해당 분야에서 저명한 한 선생님이 계셨는데, 학부 때 감명깊게 읽었던 논문의 저자셨고 같은 교과 교사가 모여있는 단톡방에서도 늘 교육적 아젠다를 이끄는 말씀을 하시곤 해서 마음으로 따르고 있었거든. 마침 가까운 지역에 계셨고 학교급도 같아서 부탁 드려보자 결심했지.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예행 연습을 많이 하긴 했어. 업무적으로 여쭙고 싶은것도 많았고. 심호흡 크게 한 번 하고 전화를 했어. 인사 한 번 드린적 없는 후배교사의 갑작스런 연락에도 너무나 따뜻하고 인자하셨어.
"아닐수도 있지만, 홍샘께서 처한 상황이 어떤지 조금 알 것도 같아서요."
길지 않은 대화에서도 쩔쩔매는 햇병아리 교사의 동동 거림을 간파하셨나봐.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장학 위원 역할을 흔쾌히 승락해주셨어. 그것도 모자라 컨설팅 장학 준비에 대한 팁도 왕창 주셨고. 그 때의 내게 필요한 격려와 다독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까지 아낌없이 다 내어주셨어. 모든 사람이 어떤 일이 매우 쉽고 능숙하다고 해서, 언제나 도움을 줄 준비를 하고 있진 않잖아. 그런데 내가 만난 선배 교사 중에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능력을 언제나 내어 줄 자세를 하고 있는 분들이 많았어.
기대치 않게 용기를 풀 충전한 전화통화를 마치고 알았어. 아, 지금이 울 때구나. 대화를 할 때는 꾹꾹 참았지만 전화를 끊고나서 밀려오는 감동 때문에 어둡고 텅 빈 교실에서 처음으로 조금 울었단다.
단촐한 1인 폭탄 해체 전담반에 슈퍼 히어로처럼 등장하셨던 선생님께서는 회의 때도 역시나 빛이 나셨어. 능숙한 언변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진행자 역할을 자처해 주셨고 덕분에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 우리 학교의 사례를 분석하신 뒤 맞춤형 이론과 실천 방향을 준비해오셔서 솔루션 격의 실질적인 제안도 듬뿍 나눠 주셨어. 업무 중에 내가 비슷한 얘기를 할 때는 반응이 뜨뜨 미지근했던 관리자들이 선생님 말씀에는 역시나 귀를 쫑긋 귀울이는 게 보이더라.
"혹시 근무하며 어려운 점이 있나요?"
실은 회의 전 날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어. 자료를 검토하시다 문득 생각이 났는데, 혹시 앞으로 학교에서 추진하고 싶은 교육 프로그램이나 수업 방식, 내 교육철학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하셨어. 그 때는 부족하긴 하지만 혹시 차후에 협업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어서 여쭤보시는 줄만 알았지. 회의 막바지에 이 때 전화로 나눴던 이야기를 컨설팅 솔루션에 자연스럽게 포함해서 말씀해 주신거야. 선생님 덕분에 하고 싶었던 교육 프로그램도 교내에서 진행할 수 있게 되었어. 멋진 어른이 되는 조건에 하나 더 추가했어. 우아하고 세련된 배려를 하자. 나도 언젠가 저렇게 방파제처럼 든든한 선배가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