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준공식이라는 걸 할 거래. 학교 공간의 일부를 리뉴얼하고 본관 옆에 신관을 새로 지은 것을 기념하는 거라더라. 공사를 하는 동안 학교 시설 사용에 어려움이 있었고, 일정 기간 동안 운동장에 컨테이너를 설치하고 간이 교실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어. 구성원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불편을 감수하며 나름 고생을 했지. 그래도 교육 환경이 더 나아지는 위한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여러모로 애쓰신 분들도 많았으니 의미 있는 기념식이 될 거라 생각했어. 나는 준공식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 소속은 아니었어. 행사날 변경된 일과표를 살피고 아이들 동선과 전달해야 할 것을 체크했지. 이례적으로 행사날 외부 손님이 방문하니 평소보다 옷을 단정히 입고 오라는 전달을 받았어. 출근복 중에 단정한 걸 입으면 되겠거니 생각했어.
베이지 컬러에 무릎 중간쯤 오는 기장의 H라인 스커트에 디테일이 거의 없는 크림색 블라우스를 입었어. 그 위에는 옅은 베이지 바탕에 톤다운된 브라운과 오렌지 스트라이프가 가로로 몇 줄 들어간 V넥 카디건을 걸치고 단추를 잠갔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즈음의 날씨라 딱 적당한 두께로 잘 입었다 생각했어. 그렇지만 버스에 타서 천장에 달린 손잡이를 잡으려 팔을 뻗으니 치마 안으로 집어넣은 블라우스가 딸려 올라오는 게 느껴졌어. 얼핏 '역시 정장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은 출근길은 조금 불편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학교에 도착해서 전 직원이 참여하는 임시 교직원 회의에 참석했어. 회의실에 모여서 오늘 행사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어.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부장님이 조용히 나를 향해 손짓을 하시며 살짝 부르시더라. 곁에는 우리 부서의 기획 선생님도 함께 계셨는데, 뭔가 심각한 듯 민망한 표정이셨어.
"어디 한번 봐봐. 아니 뭐가 문제라는 말씀이시지? 뒤로 한번 돌아볼래?"
교장이 내 옷은 정장이 아니라 하셨대. 단정하지가 않다는 거야. 우리 부장은 평소에도 교장의 말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어명처럼 받드는 사람이었어. 듣기로는 부장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임용되어 이 학교에 왔을 때, 소속 부서의 부장이 지금의 교장이었다고 하더라고. 부장은 선하고 좋은 분이라 인간적으로는 참 존경하는 분이야. 그렇지만 관리자와 대화를 할 때 마냥 굽히기만 하는 분이라 업무를 처리할 때 불합리한 부분마저 고스란히 떠안고, 그 불합리함은 부원들이 고스란히 떠안곤 했어. 여하튼 부장은 어명을 따라야 하는 충신의 고단함이 비치는 표정이었어. 교장이 그 말을 한 순간 아마 부장의 머릿속엔 '정장 아님' '단정하지 않음'이 각인되었을 거야. 명령어를 입력한 AI처럼. 남은 건 신속한 사태 수습뿐인 거지.
주변을 둘러보고 내 옷을 다시 봤어. 컬러가 네이비나 그레이, 블랙이 아닌 게 문제인 건가? 치마의 착용감이 좀 타이트해서 그런가? 재킷이 아니라 카디건이라서? 니트 집업 카디건을 입은 남교사도 있더라. 아, 남성 니트 집업 카디건은 정장인 건가? 발목까지 오는 분홍색 롱치마를 입은 교사도 있었어. 기장이 길면 단정은 먹고 들어가는 건가? 그 말씀을 전하시는 부장은 원피스에 볼레로 재킷(당시 유행하던 크롭 기장의)을 입고 있더라고. 원피스는 정장이라고 할 수 있나? 둘러보던 나와 눈이 마주친 친한 동료 교사가 날 향해 궁금한 얼굴 가장 아래 동그란 입모양으로 '왜?'를 말하는 걸 봤어. 그 순간 화르르 올라오는 수치심.
아, 나 지금 교복 치마통이랑 치마 길이가 애매해서 학생주임에게 불려 간 학생과 같은 건가. 치마 허릿단 접어 올린 거 아니라고 상의를 들어 허리춤을 보여줘야 하는 건가. 치마 안감에 통 줄인 흔적 없는 결백의 시접선을 보여줘야 하나.
난 갑자기 일어난 이 상황이 다 뭔가 싶었어. 당황도 했고 황당도 했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말을 들었지만, 그냥 해프닝으로 마무리되는 건 줄 알았어. 그렇게 부장과 기획 선생님과 나, 이렇게 셋이서 답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교장의 시선이 우리에게 머무는 듯했어. 그러고는 성큼 다가오더니 대뜸 이제 곧 준공식 시작되고 시간이 없으니, 나보고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래. 다가올 때만큼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교장. 뒷모습을 보니 교장도 부장처럼 원피스에 볼레로 재킷을 입었더라. 아, 눈치게임 실패한 건가. 영화 개봉일 날 무대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연단에 선 모두 무채색 옷을 입었는데 혼자만 노란 옷을 입고 온 배우를 향해 혼자만 의상 콘셉트를 듣지 못하고 온 거 아니냐는 댓글을 본 적 있었어. 오늘 나만 의상 콘셉트 못 듣고 온 건가.
교장이 전교사의 집이 어딘지 모르는 건 당연하지. 우리 집은 절대 갈 수 없는 거리였어. 다녀오면 준공식은 끝나있을 시간이었거든. 아, 혹시 식이 진행되는 동안 어딘가로 사라지라는 뜻인가 싶었어. 그럼 차라리 어디 특별실 한 구석에라도 숨어있다가 행사가 끝나면 나오라고 하던가. 기획 선생님이 학교 바로 앞에 살고 계셨어. 연령과 체구가 비슷한 편이니 당신 집에 가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자고 하셨어. 그분께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게 너무 부끄럽고 짜증이 났어. 일단 준공식 시작 전에는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아서 기획 선생님과 서둘러 학교를 나섰어.
"선생님, 저기 한번 들려 볼까요?"
학교 앞에 작은 상점가가 있었는데, 동네에 있는 크고 작은 옷가게가 몇 개 있었어. 같이 나서 주신 것도 감사한데, 댁까지 들리는 건 대민폐인 것 같아서 혹시 문 연 곳이 있으면 들려보자고 말씀드렸어. 크로커다일 레이디. 매일 출퇴근길 보던 가게인데 주로 4,5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브랜드였을 거야. 내가 이곳을 들리게 될 줄이야. 아침 10시쯤 되었던 것 같아. 철컹. 매장 안 불은 켜 있는데 문은 잠겨있더라고. 똑똑, 콩콩. 유리문을 두들겼어. 다행히 오픈 준비 중이었던 사장님이 계시더라. 급하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드리고 빠르게 옷을 둘러봤어. 머릿속에 '단정, 단정, 단정'이 맴돌고 부장과 교장의 원피스가 떠올랐지. 마침 네이비 원피스가 있었어. 원래 입는 것보다 한 치수 큰 것만 있었는데 입어보니 괜찮았어. 단정에 대한 강박과 짜증이 동시에 올라와서 화이트 컬러의 볼레로도 하나 걸쳤어. 입고 있는 대로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가위로 태그를 바로 제거하고 계산했어. 20만 원 정도 나왔던 것 같아.
"온 선생, 저 그래. 그 옷을 샀다면서."
"아, 넵."
"예쁘고 좋네. 젊은 사람은 아무거나 입어도 다 예뻐서 좋겠어."
"아... 넵."
준공식은 잘 끝났다고 해. 여기저기서 칭찬을 많이 받았나 봐. 관리자들이 매우 흡족해했다는구나. 행사가 끝나고 퇴근하려는데 복도에서 마주친 교장이 저렇게 말씀하시더라. 그 후로 추워서 입지 못하는 겨울을 제외하고 행사 때마다 꽤 오래 그 옷을 입었어. 원피스와 볼레로. 학교가 인정하는 최고 단정한 옷. 전문 직종에게 시간, 장소, 상황에 맞는 의상을 갖추는 TPO 매너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 공무원 품위유지 조항이 있는 이유도 알고 있고. 무엇보다 교사는 매일 교실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연단에 서야 하는 강의자이자 매 순간 말과 태도로 학습자에게 신뢰를 줘야 하니까. 그렇지만 그날 품위가 없었던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고 생각해.
내게 옷을 갈아입으라 말했던 교장은 그 후로도 교사의 복장에 대한 간섭이 많던 사람이라, 퇴임하기까지 수많은 에피소드를 적립했어. 자세히는 말하지 않겠지만 교사의 양말 색깔, 학교에서 신는 실내화의 굽 높이, 귓불에서 떨어진 귀걸이 등등. 누군가의 외관을 보고 단정함과의 괴리를 재단한 뒤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것. 물론 기준은 자기 자신의 생각이고. 그런 행동을 보면 역시 '권력'과 '오만함'은 가장 친한 친구라 딱 붙어 다니나 보다 싶더라. 이미 오래전에 놓아버린 타인에 대한 '존중'은 기억조차 못하겠지? 나중에 알았는데 준공식 날 나 말고도 옷을 갈아입고 올 것을 지적받은 동료 교사가 또 있었더라고. 얼핏 말했던 니트 집업 카디건의 남교사. 나중에 알고 둘이 어찌나 웃었던지. 행사 때마다 '선생님, 옷이 단정하지 않은데 아무래도 집에 다녀오셔야겠는데요?'라면서 놀리곤 했어.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같지만 10년도 안된 과거의 일이야. 관리자가 자신의 기준에 따라 교사의 복장을 합격과 불합격을 줬다는 나의 에피소드를 보고, 네가 '샘, 우리 학교도 그래요.'라는 말만큼은 부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