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수요일이구나. 오늘 조회 시간은 어떤 분위기였니.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했으려나. 한 주의 시작부터 인상 찌푸리고 싫은 말을 늘어놓아야 하진 않았는지, 묵직한 메시지로 동기 부여를 주기 위해 짐짓 무거운 목소리 톤을 꾸며내지는 않았는지, 우연히 눈치챈 반 아이의 잘못을 오늘 하루 중 언제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언젠가 네가 칭찬보다 몇 배나 더 어려운 게 꾸짖는 거라고 말했던 게 떠올라.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잘 혼내는 건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며. 그러게. 잘 혼낸다는 건 뭘까. 타인이 듣기 싫을 게 분명한 말을 하는 게 교사라고 뭐 쉽겠니. 말을 해야 하는 최고의 순간을 열심히 고르고 머릿속으로 최상의 시나리오를 꾸려놓잖아. 태도뿐 아니라 꾸짖음으로 전달해야 할 메시지도 내용과 수위가 적절한지 가늠하는 게 늘 어려워. 생활 지도에 능한 교사란 프로 혼냄러, 꾸짖러 가 되어야 하는 것 같아.
어느 해 가을. 도시 중심의 잔디광장에서 진행한 교육체험 축제에 학생들과 참여해 체험 부스를 운영한 적이 있었어. (너도 참여했던 그 행사!) 금요일부터 주말까지, 꼬박 2박 3일 동안 가로 세로 3m짜리 행사용 텐트 두 칸으로 출근하고 퇴근했었지. 하루 종일 가을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었어. 비가 안 와서 좋았지만 또 높고 길게 쏟아지는 가을볕과 하이파이브하느라 애들도 나도 얼굴이며 팔이며 노릇노릇 제대로 그을렸지.
뜨거운 광장의 가을이 있기 전에 뜨거운 여름도 있었어. 체험 부스에서 운영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준비하기 위해 다 함께 여름 방학부터 꼼지락 거렸었잖아. 방학이라고 한가할 리 없는, 어쩌면 더 바쁜 아이들이 없는 시간을 쪼개서 하는 것이니 만큼 그 무엇보다 값진 경험이 될 수 있었음 했어.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고전적인 교훈을 전해주기 위해 조금 벅찰 만큼의 과제를 주고 곧장 피드백을 주며 타이트하게 이끌었어. 녹록지 않았을 준비 기간 내내 아이들은 지도 교사인 내 눈치를 봤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아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도전할 만큼의 과제를 내어 주느라 나 역시 아이들 페이스와 컨디션에 따라 잔뜩 눈치를 봤던 것 같아.
그래도 우리는 여름의 열기에 지지 않았어. 함께 여름을 보내며 선후배끼리 관계의 밀도가 더욱 진해진 게 보였고, 나와 아이들의 연대감도 부쩍 깊어졌어. 마주치며 주고받은 대화 속에 담긴 친밀감과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느껴지잖아. 한편으로는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자신을 믿고 꾸준히 노력하는 미덕에 대해 알려줄 수 있어서 좋았어. 뭐든 편리하고 빠른 게 미덕이 되는 시대라고 교육 과정과 목표 수행 과정도 그러길 원하는 아이들이 제법 있잖아. 꾸준한 노력과 진심을 담은 협력. 과제 수행 시 혼자 몰래 설계해 놓은 교육 목표였거든.
찰지게 뒤엉켜 보낸 그 여름의 시간 덕에 다가온 가을 앞에 당당했어. 최선을 다한 자들의 당당함. 다행히 행사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어. 마지막 날엔 체력적으로 한계가 왔었지. 그럼에도 교실에서는 보기 힘든, 학교 밖에서만 보이는 애들 특유의 자유로운 생기와 밝은 에너지가 좋았어. 축제 폐회 행사와 해단식을 한 뒤 우리 학교 부스를 정리하고 나니 저녁 시간 즈음이었어. 너나 할 것 없이 연신 꼬르륵 거리며 배에서 천둥소리가 났지. 나는 행사를 위해 학교에서 가져온 큰 짐들을 차에 싣고 학교에 다시 내려놓아야 했어. 마지막까지 남아서 부스 정리를 한 아이들은 간부와 자원해서 정리를 도운 몇몇이 있더라고. 마지막까지 성장한 모습에 대견해서 대표 아이를 불렀어. 난 학교에 잠깐 들어가야 하니 학교 근처에서 너희끼리 간단히 저녁을 먹고 가라고. 대표 아이에게 밥을 먹을 만큼의 돈을 쥐어 줬지. 크게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와글와글 거리는 너희를 뒤로 하고 학교로 향했어.
지하 주차장 한 곳에 짐이 든 박스들을 내려놓았어. 도저히 건물 안까지 혼자 옮길 엄두가 안 나더라. 월요일 아침에 아이들 도움을 받아 옮겨야겠다 생각하고 집에 가서 맥주 한 잔 해야겠다! 했다가 멈칫했어. 그래도 애들 밥 먹는 곳을 들려서 살펴보고, 빨리 집에 들여보내야 마음이 편하겠는 거야.
"어디니?"
"샘! 저희 집에 가고 있어요."
"엥. 벌써? 뭐 먹었길래 이렇게 빨리 끝났어?"
"저희 뭐 먹을까 이야기하다 그냥 저랑 A, B 셋이 떡볶이 먹고 다른 애들은 돈 나눠 가지고 집에 갔어요."
"돈을 나눠 가졌다고?"
"네, 사람 수대로 나눠 가졌어요."
내가 밥 사 먹으라고 준 돈을 1/N으로 나눠가졌다는 거야. 전화를 건 뒤 아이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내 머릿속에는 식탁에 둘러앉아서 자신들이 멋지게 끝낸 교과발표 축제의 에피소드를 나누고 까르르 웃는 모습이었는데! 이런 전개가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통화를 하며 처음 올라온 감정은 연유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화' 였어. 그다음은 '황당함'이었고. 세 번째로 떠오른 건 '의문'이었어. 이유를 찾기 위해 이어간 대화에서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어. 그나마 납득할만한 상황 논리는 예닐곱 명 있었던 아이들끼리 먹고 싶었던 음식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는 거야. 이거 맞아? 합리적인 의사결정으로 봐야 하는 걸까. 대화와 타협, 배려와 희생, 단합과 협력. 이 행사를 통과하며 내가 가르쳐 주고 싶었던 가치를 지금 당장 아이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할 멋진 흐름이 그려지지 않았어. 그럼 그렇지. 난 프로 혼냄러 내지는 꾸짖러가 아니었던 거야.
집에 와서 남편에게 물었어. 이래저래 해서 아이들이 돈을 나눠 가지고 집에 갔는데 너무 황당해서 내일 뭐라고 설명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남편은 '요즘 애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라고 얘기해 줘서 나는 또 놀랐어. 하나의 목표를 함께 이뤄낸 선후배끼리 뒤풀이하며 생생한 감정을 나눠 가지라고 한 건데 그 자리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줬어야 했던 걸까. 아니, 학교에 짐을 내려놓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까지 내가 임장을 했어야 했던 걸까. 난 별로 먹고 싶지 않지만 다수가 원하는 음식을 통일해서 먹으며 뒤풀이를 하는 것. 이거 혹시 장, 감들이 좋아하는 회식 문화를 내가 조장하고 있었던 건가. 등등의 생각들이 머릿속에 뒤엉켰지. 남편은 교사가 아니기에 무언가 옳고 그름을 떠나 요즘 아이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해준 거였어. 그렇지만 나는 교사니까, 우리는 교사니까.
다음 날, 대표 아이를 불러서 대화를 했어. 같은 목표를 이뤄낸 구성원을 독려하고 더 돈독하게 만드는 자리를 만들라는 거였는데, 선생님과 학생 대표인 너와의 소통이 크게 어긋난 것 같다고. 최대한 차분히 설명하려 했어. 그런데 내 말을 듣는 아이의 눈에는 큰 물음표가 떠 있는 것 같았어.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서 나의 말을 밀어내는 건가. 답답하고 초조해져서 더 분명한 메시지를 주기 위해 냉정하고 날카로운 단어를 불쑥불쑥 내밀며 혼을 내는 분위기로 변했어. 그럼에도 아이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어. 평소에도 나와 대화를 많이 하던 아이였는데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듯했어. 어색한 대화를 마무리 한 뒤, 씁쓸함이 몰려왔단다. 이왕 이렇게 될 거 더 제대로 잘 혼냈어야 했는데.
사실 너도 알고 있지? 어른으로서, 교사로서 학생의 석연찮은 행동을 발견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옵션. 혼내지 않기. 외면하기 혹은 모른 척 하기의 다른 표현이잖아. 그래도 우리 아직은 포기하지 말고, 아이들을 바라보자. 제대로 더 잘 혼내는 방법은 분명 있을 거야. 너도 그렇잖아. 우리가 아이들에게 화내고 혼을 내는 까닭은 절대 우리 각자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그 아이에게 좀 더 나은 선택을 알려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인 거잖니. 그러니 오늘도 꾹꾹 눌러 담은 밥 한 그릇 든든히 먹은 뒤, 진심도 꾹꾹 눌러 담아 최선을 다해 혼내는 어른이 되어보자꾸나.
이 글은 교사로 10여 년을 근무하고 새로운 꿈을 좇기 위해 셀프 퇴직한 전직 교사가 한 특별한 후배 교사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에서 같은 전공을 선택한 뒤 결국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는 동료이자, 이제는 10년 지기 친구가 된 어린 벗. 그의 슬픔에는 함께 울고 기쁨에는 함께 웃었습니다. 늘 도움을 주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서로를 보듬으며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가 된 듯합니다. 이 글이 비단 학교현장뿐 아니라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비릿한 성장통을 겪고 있는 모든 어른이들과 함께 위로를 나눌 수 있는 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