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방영한 <블랙독>이란 드라마 봤니? 사회초년생 기간제 교사가 사립 고등학교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인데, 시청률이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화제성이 높았고 웰메이드 작품이라며 대체로 평이 좋았나 보더라고. 현직 교사가 쓴 대본이라 등장인물이나 에피소드, 배경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라고도 하고. 난 보진 않았지만 친구들이 있는 톡방을 통해 드라마 속 몇몇 에피소드를 접했어. 그걸 보며 학교와 관련 없는 직업을 가진 친구들은 공감하거나 분노하거나 거짓말 같다거나 하는 등 여러 반응을 쏟아냈지만, 정작 난 아무런 감흥이 없더라. 드라마의 내용보다 친구들이, 시청자들이 놀라워하는 그 반응이 더 놀라웠어. 그 드라마에 나온 이야기 대부분 어제와 오늘, 어쩌면 매일 일어나는, 내가 학교에서 자주 마주했던 평범한 일들이라.
오래 달리기를 하면 끝 무렵에 입안을 맴도는 비릿한 피 맛을 떠올리게 하는 교사가 있었어. 기간제 교사로서 근무한 두 번째 학교에서 함께 근무한 김 선생. 그는 20대였던 나와 비슷한 또래였는데 벌써 교무부 기획 교사를 몇 해째 하고 있었어. 꽤 이른 나이에 정교사에 임용되었다 하더라고(학교마다 다르지만 당시 내가 근무했던 곳은 어느 정도 연차가 쌓여야 교무부의 기획 교사가 될 수 있었어). 김 선생의 자리는 본 교무실 가운데에 있어서, 오며 가며 그의 뒤통수를 자주 볼 수 있었어. 그는 모니터 바탕화면 한쪽 귀퉁이에 늘 스포츠 중계 화면을 틀어놓더구나.어느 날은 농구, 어느 날은 축구, 어느 날엔 마라톤.
왠지 모르지만 어느 날 아침 난 전력질주 중이었어. 열심히 뛰고 또 뛰었지. 그런데 알고 보니 마라톤에 참여한 거라는 거야. 내가 신청한 적도 없음에도 태어났을 때 자동으로 신청이 되었다나 뭐라나. 명확한 골인 지점으로 들어와야 하는 거고 기록과 순위가 매우 중요하다 해. 그런데 맙소사. 난 계속 뛰긴 뛰었는데 그동안 출발 라인 바깥에서 열심히 뛰기만 했던 거야. 출발 총성은 울린 지 이미 오래고. 42.195km 중 체감상 이미 42km는 달린 것 같아. 지쳐서 숨이 차고 시야가 흐릿해졌지. 저만치에서 작은 점이었다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며 골인 지점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여. 자세히 보니 그 점 중 하나가 김 선생이었다는. 그런 악몽. 혼자 상상했었어. 그래서 그를 볼 때마다 그렇게 피맛이 났던 걸까.
김 선생과는 업무적으로 직접 부딪힐 일이 없었지. 그렇지만 그는 늘 교내 인기 급상승 에피소드의 주요 등장인물이었어. 김 선생의 무례한 태도에 점잖기로 유명한 교사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여 화를 냈다는 이야기, 건실한 젊은이가 여태 짝이 없는 게 말도 안 된다며 교장이 열심히 김 선생을 위한 선 자리를 알아봐 주고 있다는 이야기, 수업 중 학생에게 상스러운 욕을 하고는 농담이었다며 퉁쳤다는 어이없는 이야기, 사석에서 교무 부장을 형님이라 부르고 둘은 의형제를 맺을 만큼 돈독하다는 이야기, 회식이 끝나면 장감과 부장들의 대리운전을 자처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또래 교사들과 술을 마시면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주사를 부린다는 이야기.
소문은 소문일 뿐 곧이곧대로 다 믿지는 않았지. 그렇지만 한 학기 가량 지나고 나니 나 역시 김 선생을 겪으며 알게 되었어. 강자에겐 약하게, 약자에겐 강하게. 그래, 맞아. 그는 '강약약강'이란 말을 인간화 한 사람이었어.그리고 난 앞 구르기를 하며 봐도 그 학교에서 '약 of 약'이었고.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격언을 마음에 품고 슬쩍 김 선생과 거리를 뒀어. 시간이 흐르며 김 선생의 캐릭터는 더욱 구체화되어 갔지. 자신보다 약자라고 생각하면 그 누구에게나 예의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기간제 교사에게 유독 야박하게 구는 걸 몇 번 보게 되었어. 아니겠지, 기분 탓이길, 내 자격지심이길, 오해이길 바랐지만. 결국 쐐기를 박는 사건이 벌어졌어.
원래도 정신없지만 한창 고사 기간이 되면 본 교무실은 평소보다 더 분주해지잖아. 종이 치면 교무실 한편에 대기한 교과 담당 교사에게 OMR 답지를 전달하고, 다음 교시 감독을 들어가기 위해 시험지 뭉치를 챙기고, 날인용 도장과 펜도 챙겼나 확인도 해야 하고. 그때 보면 각자의 목적지와 순서에 맞게 빠르게 움직이는 교사들은 리허설을 하지 않은 채 슛에 들어가도 깔끔하게 동선을 정리할 줄 아는 베테랑 배우들 같아. 아무튼 그때 난 서술형 답지가 있는 과목의 감독을 마치고 온 상태였어. 교무실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에서 천공기를 활용해 서술형 답지를 철 하는 중이었어.
"그러니까 여태 기간제를 하고 있는 거야. 알겠어?"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의 가슴에 세게 박힐 말은 내 귀도 따끔 찔렸어. 그 말이 다른 말을 모두 교무실 밖으로 밀어냈나 봐. 시끌시끌하던 교무실에 한 순간 정적이 찾아왔어. 모두들 손은 그대로 분주한 상태에서 고개만 좌우로 돌리거나 목을 쭉 뺐어. 이 소리 어디에서, 누가 한 말인 거야? 교무부 쪽 천장에 어두운 오오라가 있더라. 김 선생이 누군가를 향해 윽박지르고 있었어. 그 사람은 오랫동안 여러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해온, 나이가 조금 많은 과학 교사였어. 방금 전 감독을 들어간 교실에서 뭔가 일이 있었나 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김 선생을 말렸고, 과학 교사는 그 자리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울고 있었어. 표정의 변화 없이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눈물만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어. 본인이 운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거나, 참으려 했지만 눈치 없는 눈물이 속절없이 눈 밖으로 밀려났거나. 일을 하며 많은 학생을 위로했지만 동료를, 어른을 위로하는 건 여전히 잘 못해. 어쭙잖은 위로의 말보다 모르는 척하는 게 세련된 어른이라 배운 비겁한 나.
어느 날, 나이스에서 상장 일련번호를 따고 업무 상신을 해야 했어. 김 교사와 메신저로 이야기하며 업무 협조를 한 뒤 나이스 상장 대장에 기입했어. 그런데 하고 보니 나와 동시에 다른 선생님이 같은 일을 진행하고 계셨던 거야. 나와 그 선생님이 입력한 상장의 번호가 뒤죽박죽이 되었어. 큰일 났다 싶어 서둘러 그 선생님과 통화를 한 뒤 교무실로 내려가 김 선생 자리에서 만나기로 했어. 나와 동시에 상장 대장을 기입한 선생님은 40대가량의 학년부 기획 교사였어. 삼자대면처럼 나, 김 선생, 40대의 선배 선생님 셋이 이야기를 하며 일의 자초지종과 해결 방안을 이야기하던 중이었어.
"그러니까 네가 잘했어야지. 이게 뭐야. 너 때문에!"
문득 TV를 켰는데 마지막으로 설정해 놓은 볼륨이 생각보다 컸던 거야. 예상보다 너무 큰 소리가 나 순간 깜짝 놀랐던 적 있지? 자리에 앉은 김 선생은 서 있는 나를 보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발사하듯 말했어. 아마 강약약강 적으로 상황을 보니 이 일의 잘못은 그냥 내가 되어야 하는 거로 결론을 낸 건가 봐. 내 잘못이 아닌데 나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것 같은 뉘앙스의 대사를 엄청 큰 목소리로 하더라고. '이 일은 홍 선생 잘못입니다 여러분!' 교무실에 있는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 너는 알지? 내가 눈물이 얼마나 많은지. 난 어릴 때부터 누군가 소리를 지르면 무서워서 눈물부터 흘리는 쫄보였어. 눈물아 안돼. 나오지 마.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눈물 보이면 바로 KO패잖아. 어릴 때 놀이터에서 치고받고 싸우다 코피 흘리는 사람이 자동으로 패배자가 되는 것처럼. 이번엔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어. 공공의 적 강약약강 너에게만큼은!
"왜 소리를 지르세요. 누군 소리 못질러? 샘이 쿨메신저 보낸 거나 다시 읽어 봐요. 뭐라고 썼나."
복식호흡을 배워둔 걸 이 때 처음 쓴 것 같아. 있는 힘껏 큰 소리로 말했어. 교무실 문을 닫고 복도에 섰는데 다리가 풀려서 후들후들 거렸어. 귓가엔 둑둑둑둑둑 하는 소리가 나고.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내 심장 소리였어. 순간 너무 긴장했더니 두근두근이 둑둑이 되더라고. 눈물이 날까 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 안으로 대피했어. 아이고, 내가 미쳤구나. 미친개를 물어봤자 같이 미친개 되는 건데. 교무실에 몇 분 안 계시긴 했지만 보는 눈, 듣는 귀도 있었는데. 그런데 자리에 와서 모니터를 보니 상태창 하단에 반짝 반짝이는 메시지. 김 선생에게 온 거였어. 미안, 잠깐. 미안합니.... 다? 나랑 선배샘이 동시에 할 걸 생각 못하고 그냥 둘에게 모두 바로 기입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는 거야. 나도 곧장 그에게 날카롭게 말해서 미안하다고 했어. 이 일이 있고부터 김 선생은 나를 친한 듯, 불편한 듯 대하게 되었어. 심지어 직장에서 함께 업무를 하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사이의 동료까지 되었어.
학교 리모델링 TF 회의에서 석연찮은 화법으로 기간제 교사인 너에게 잘못을 떠넘긴다는 부장이 있다고 했잖아. 누구보다 그 프로젝트에 진심이라 사활을 걸고 몰두했던 널 나는 알기에 교묘하게 불쾌하고, 우아하게 괴롭 하고, 은밀하게 보복당하던 기간제 시절의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어. 너에게 편지를 쓰다 보면 나도 몰랐던 내 안에 멍울진 상처가 아프고 쓰려와. 새살이 돋기 전에 계속 쓸리고 갈려서 아물지 못했던 걸까.김 선생을 보며 느꼈던 피맛은 제 때 지혈하지 못한 그 마음속 상처에서 올라오던 것이었을까. 그래도 그때의 기억을 두들기며 더 강하고 또 유연하게 담금질해서 지금의 날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야. 아직 남은 내 상처를 보여줄 테니 너도 너의 상처를 보여주렴. 우리 같이 돌보고 함께 아물자.
이 글은 교사로 10여 년을 근무하고 새로운 꿈을 좇기 위해 셀프 퇴직한 전직 교사가 한 특별한 후배 교사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에서 같은 전공을 선택한 뒤 결국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는 동료이자, 이제는 10년 지기 친구가 된 어린 벗. 그의 슬픔에는 함께 울고 기쁨에는 함께 웃었습니다. 늘 도움을 주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서로를 보듬으며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가 된 듯합니다. 이 글이 비단 학교현장뿐 아니라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비릿한 성장통을 겪고 있는 모든 어른이들과 함께 위로를 나눌 수 있는 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