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위의 단단한 철학자, 건축

Ronda, SPAIN 2016.01.19.17:33

by 홍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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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안되는 건축물이었다. 그 당시 꽂혀 있던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나 나올법한 곳의 실사판이었다. 100m가 넘는 깊이의 협곡 위에 세운 다리라니. 그것도 무려 18세기에! 불규칙한 높이의 양쪽 절벽 위에 비슷한 색감으로 쌓아올린 직각 벽돌은, 마치 절벽에서 돋아나 자란듯했다. 절벽과 다리의 접합부를 집중해서 보면 한없이 위태롭지만, 멀리서 다리와 협곡이 어우러진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니 또 견고해 보였다. 이런 매력적인 건축물의 존재를 도대체 왜 아무도 안 알려준거지? 우연히 구글맵에서 보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어! 우리는 우리의 무지함을 넘어설 수 있게 한 우연에 감사하며 조용히, 그러나 신속 정확하게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여행 계획을 수정했다. 보통 여행자들은 그라나다에서 코르도바를 거쳐 세비야로 가는 일정을 택한다. 나와 남편은 코르도바를 버리고, 론다를 택했다. 오직 이 다리 하나를 보기 위해서.


황갈색의 누에보 다리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노랗게 익어가고 있을 무렵, 다리 위를 걸었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도시는 늘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에게 먼 곳의 풍경까지 허락했다. 초록 구릉이 오르락 내리락 이어진 곳에 딱 자동차 한 대 정도 지날 정도의 가는 도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이 여럿 보이는 작은 마을이 반복해서 생겼다 사라졌다. 다리는 생각보다 컸다. 엘 타호 협곡에 걸쳐진 이 다리는 완공된 1793년부터 지금까지 론다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고 있다. 다리를 걸치고 있는 협곡은 양 단면에 퇴적물을 쌓아 올린 시간의 성실함을 고스라니 드러내고 있었다. 다리의 중간 지점에 서서 120m 아래에 흐르고 있는 과달레빈강을 내려다봤다. 강의 밑바닥에는 협곡보다 더 낡은 시간들이 잠겨있을 것이다. 협곡이 생기고 다리가 놓이는 그 모든 시간을 조용히 바라보며, 잊혀진 약속과 숨겨진 비밀을 품은 채.


론다를 찾는 사람들이 주로 묵는 유서 깊은 유명 호텔을 뒤로 하고,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했다. 시설은 호텔에 견주기 힘들지 모르나, 누에보 다리에 자부심을 가진 이 도시 토박이 호스트의 정다운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침실과 화장실, 거실과 주방까지 있어 좁은 호텔생활에 지친 우리같은 여행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심지어 집의 어느 곳에서도 누에보 다리가 손에 닿을 듯 보였으니, 마음 속으로 숙소뽑기 대성공을 외쳤다.


느적느적 걸으며 대충 도시를 훑은 뒤 마트에 들려서 식량을 잔뜩 사왔다. 론다에 머무는 동안엔 바깥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다. 사온 재료들로 요리를 해 먹으며 오랜 시간동안 숙소에 머무르며, 누에보 다리 뷰를 만끽했다.지적 허영심이 마음에 싹틀 무렵부터 내가 닿을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지성인들을 흠모하고 또 질투했었다. 시대는 부지런히 유려한 논리와 선지적인 지성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는 학자를 배출했다.그들의 말과 글은 행동하지 않는 한 책 속에 잠들어 있고, 누군가의 머리와 가슴 속에 있지 싶다. 그래서 유독 건축가를 질투했었다. 오직 건축가만이 자신의 철학을 지상위에 단단한 형태로 남길 수 있는 사람 같았기에.


200여년 전과 지금의 도시 풍경은 제법 달라졌을 것이다. 거대한 다리만이 여전히 시간을 두고 발전한 두 시가지를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몇만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여행자를 아주 손쉽게 이 곳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저 거기 있었고 여전히 있음으로 인해서. 론다를 떠나 세비야로 가는 날, 자동차로 누에보 다리를 건너 보았다. 밟고 걷고 만지고 서성이고 바라보고. 다리에서 해볼 수 있는 걸 다 해본 셈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당분간, 아니 이제 론다에 올 일은 없을 것 같다. 오지 않아도 누에보 다리가 이 곳에 있음을, 아주 생생히 실감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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